[뉴스룸에서-송세영] 신용카드와 결별할 때
입력 2011-08-17 17:47
신용카드는 이미 괴물이 됐다. 우리나라의 1인당 신용카드 발급 건수는 미국에 이어 세계 2번째다. 경제활동인구를 기준으로 하면 1인당 평균 4∼5개의 신용카드를 갖고 있다. 신용카드 돌려막기, 카드 불법할인(카드깡) 등으로 신용불량자들이 양산되는데도 새 신용카드는 한 달에 100만장씩 꼬박꼬박 발급된다. 소득이 없어도, 신용이 불량해도 카드를 발급해준다는 광고가 거리에 넘쳐난다.
신용거래란 결국 빚을 내서 재화를 구입하는 것이다. ‘빚 권하는 사회’의 중심에는 대부업체보다는 신용카드가 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다. 그런데도 유명 연예인이 대부업체 광고에 출연하면 뭇매를 맞지만 신용카드 광고에 출연하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신용카드의 부작용에는 둔감하다.
영세 자영업자들이 신용카드 수수료 부담에 허리가 휜다는 것은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하지만 ‘친서민’을 자처하는 현 정부 아래서도 뚜렷하게 나아진 게 없다. 지난 3월 기준 신용카드 가맹점 수는 1772만여개인데 영세 가맹점일수록 수수료율이 높아서 매출의 3%를 넘는 경우가 많다. 반면 규모가 크고 매출이 많을수록 수수료율은 낮아지는데 아무리 시장의 논리라 해도 서민들의 정서로는 받아들이기 힘들다. 정부의 역할이 필요한 곳이 바로 이런 대목일 텐데 이따금씩 카드사들에게 엄포나 놓을 뿐 힘을 쓰지 않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우리나라 신용카드의 수수료율이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점이다. 각종 할인에 이벤트에 막대한 광고·마케팅 비용까지 조달하고도 이익을 남겨야 하니 수수료를 많이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높은 수수료는 가격에 전가돼 소비자들의 부담으로 돌아간다. 소비자들 중에서도 신용카드를 사용하지 않는, 따라서 카드사 포인트 한 점 적립될 일 없는 사람들의 부담이 더 크다. 개인의 건강한 소비생활을 위해서도, 건전한 국가 경제를 위해서도 이제 신용카드와 과감하게 결별할 때가 됐다. 수수료율이 훨씬 낮거나 아예 0이면서도 투명한 거래를 보장할 수 있는 직불카드나 선불카드, 현금영수증 같은 대안들은 이미 나와 있다.
익숙한 것과 결별하는 데는 고통이 따른다. 신용카드도 마찬가지다. 오죽하면 담배 끊기처럼 어렵다는 말까지 나올까. 신용카드의 치명적인 유혹은 강한 중독성을 발휘한다. 결제할 때마다 적립되는 마일리지와 포인트, 각종 할인혜택에다 신용카드를 사용하지 않으면 왠지 손해 볼 것 같은 불안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그래서 비상한 용기와 결단, 그리고 결행이 뒤따르지 않으면 신용카드와 결별은 어렵다.
‘신용카드 바로쓰기’ 수준의 캠페인이 근본적인 해법이 될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개인적 결단에만 기댈 수 없는 것도 같은 이유다. 신용카드 발급자격 강화니 카드론 규제니 하는 땜질식 처방으로도 안 된다. 신용카드에 익숙해진 습관과 문화에서 벗어나려면 과감하고도 근본적인 처방이 필요하다.
핵심은 신용카드 팽창의 가장 강력한 동인인 근로소득 공제제도를 손질하는 데 있다. 정부는 1999년 세원확보를 위해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던 신용카드 사용액에 대한 근로소득 공제제도를 도입했다. 정책목표를 달성한 뒤 정부는 거듭 폐지를 추진해왔지만 번번이 벽에 부닥쳤다. 세수증대라는 논리를 전면에 내세워 서민부담만 늘린다는 반론을 넘어서지 못했다. 하지만 신용카드 소득공제를 폐지하는 동시에 현금영수증 거래나 직불·선불카드에 대한 소득공제를 확대하고 서민들에 대한 소득공제를 확충하면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
연장을 거듭해 온 신용카드 소득공제제도의 예정된 일몰 시한은 올해 말이다. 정부는 이미 2년 연장을 검토 중이다. 내년에는 총선과 대통령선거가 예정돼 있다. 명분도 실리도 없이 선거를 의식해 연장 결론을 낸다면 포퓰리즘의 또다른 전형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송세영 사회부 차장 sysho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