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피해서” “가족들 알까봐” “받지도 못할텐데” 자포자기… 보이스피싱, 수치심 먹고 큰다
입력 2011-08-16 22:13
금융회사 간부 정모(57)씨는 지난 5월 전화금융사기(보이스피싱)를 당해 7000만원이나 떼였다. 수사기관을 사칭하며 사기 사건에 정씨의 계좌가 연루됐다며 금융정보를 알려 달라는 전화에 감쪽같이 속은 것이다. 그러나 정씨는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다. 경찰 관계자는 “금융회사 간부가 보이스피싱의 피해자가 됐다는 사실이 창피해 숨기고 싶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하지만 지난달 초 검거된 보이스피싱 조직원의 압수물에서 정씨가 돈을 찾은 출금 명세표가 발견되면서 피해 사실이 드러났다.
보이스피싱 피해는 최근 급증하고 있다. 서울지방경찰청은 올해 1∼7월 서울지역 보이스피싱 피해금액은 190억6000만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 97억2000만원에 비해 2배 가까이 늘었다고 16일 밝혔다. 피해 건수도 올해 1∼7월 1769건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 995건보다 78% 증가했다.
경찰은 피해자들이 가정불화나 체면 등을 고려해 신고하지 않는 보이스피싱 피해의 속성상 실제 피해 규모는 이보다 클 것으로 추산했다. 신고해 봐야 돈을 찾기 힘들 것이라는 피해자들의 자포자기 심정도 신고를 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다.
경북 포항에 사는 주부 임모(56)씨도 지난달 말 보이스피싱에 말려들어 300만원의 피해를 입었지만 신고하지 않았다. 남편이 알게 되면 부부싸움이 불가피하고 자식들에게 나이들어 보이스피싱에 당했다는 소리를 들을까봐 혼자 가슴앓이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피해 신고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보이스피싱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이웅혁 경찰대 교수는 “보이스피싱 수법은 시시각각 진화한다”면서 “새로운 피해 유형이 수사기관에 원활하게 접수되지 않으면 대처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한편 정부는 16일 국무회의를 열고 보이스피싱 등 금융사기 피해자가 별도의 소송 절차 없이 3개월 안에 피해금을 돌려받을 수 있는 내용의 ‘전기통신금융사기 피해금 환급에 관한 특별법’ 시행령 제정안을 의결했다.
시행령에는 금융감독원의 채권소멸 공고 기간(2개월) 동안 계좌명의인의 이의 제기가 없을 경우, 금융회사는 피해자가 지정한 계좌로 피해금을 되돌려주도록 하는 내용이 담겼다. 또 보이스피싱 피해자가 전화로 금융사에 지급정지 신청을 할 수 있도록 했다. 기존에는 피해자 본인이 사기계좌의 인출을 직접 정지시킨 뒤 그 계좌에 돈이 남아 있을 경우에만 재판을 통해 피해금을 찾을 수 있었다.
이도경 김남중 기자 yid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