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포커스-이규영] 일본의 ‘빌리 브란트’를 기대한다
입력 2011-08-16 17:52
금년에도 8월 15일 광복절을 맞이했다.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 60여년이 지났다. 한국민은 최근 쓰나미와 원전사고를 당한 이웃 일본의 아픔을 위로하며 정성스레 도왔다. 그런데 일본 법원은 생존 한국 유족들의 야스쿠니신사 합사취소 소송에 패소 판결을 내렸다. 일본정부는 대한항공 A380기의 독도 시험운항에 일본 외교관들의 탑승금지 조치를 내렸다. 무명의 일본 의원들이 독도영유권을 주장하며 울릉도를 방문하려는 유치한 행태가 벌어졌다. 한국민은 분개하고 있다. 일본이 전후 여러모로 많이 배웠던 독일은 역사 반성에 철저한데, 왜 일본은 이토록 인색한지 커다란 의문점을 품는다.
일본, 독일 역사 배우길
전후 독일은 철저한 역사 반성으로부터 출발하였다. 독일도 한때 50년대 초 아데나워 총리의 보수 기독민주연합(CDU) 집권시절 과거사 반성에 인색하였다. 사회 안정과 통합이라는 명분으로 나치 협력과 부역자 문제 해결에 소극적이었다. 그러나 독일은 9개 나라와 국경을 맞대면서 철저한 역사 극복만이 유럽통합과 평화 구축에 필수적 요건임을 알아차렸다. 또 역사 반성과 더불어 민주주의와 인권을 목표로 내세우며 유럽통합을 선도하였다. 일본은 지정학적으로 직접 국경을 맞댄 나라가 없다. 이런 까닭에 일본은 과거사 반성에서 아직도 여유를 찾고 있다. 그러나 일본은 세계화시대 국경의 의미가 변화하고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독일의 역사 반성은 1953년 나치 피해자를 대상으로 한 ‘연방배상법’의 제정으로 구체화되었다. 이후 현재까지 614억 유로(약 85조원)의 배상금이 지급되었다. 한 동유럽 유대운동가는 “망각하려는 것은 유랑을 연장시키고 기억이야말로 구원의 열쇠이다”라는 촌철살인의 명언을 남겼다. 독일 역사교과서의 경우 히틀러 나치의 역사는 12년에 불과하지만, 독일 현대사에서 차지하는 나치시대의 비중은 30%에 이른다. 반면 일본 국회는 1953년 “일본에는 전범이 없다”라는 결의를 하고, 이후 아시아 침략전쟁 당시 A급 전범자들이 정계에서 득세하였다. A급 전범은 연합국이 일방적으로 규정한 것일 뿐, 일본 국내법상으로 범죄자가 아니라고 인식한다. 38년 동안 한반도를 억압과 고통으로 몰아갔음에도 과거사 인정에 여전히 인색하다.
독일의 역사 반성으로 2005년 5월 통일 수도인 베를린 시내 요충지인 브란덴부르크문 바로 옆 노른자위 땅에 1만9000㎡(약5760평) 규모로 유대인 추모공원이 조성되었다. 독일정부는 2760만 유로(약 370억원)의 공사비용으로 2711개 돌을 파도물결의 조형물로 만들어 최소 550만명에 달하는 희생자의 넋을 위로하고 있다. 추모공원을 만든 것은 나치정권의 만행을 잊지 않으려는 독일민족의 의지이며, 공원을 중심가에 만든 것도 이 같은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의지의 표현이다.
긴자 거리에 추모비 세워야
일본이 동아시아 국가들에 끼쳤던 아픔, 종군위안부, 강제징용자와 난징대학살, 731부대 희생자를 위한 추모비 하나라도 도쿄 긴자 거리에 세우기를 기대하는 것은 호사일까 아니면 사치일까. 독일은 1960년대부터 경제가 부흥하기 시작해 과거사를 돌아보기 시작했다. 1969년 빌리 브란트 총리 집권으로 역사 반성이 본격화되었다. 1970년 12월 폴란드 바르샤바 방문 중 그는 유대인 게토에서 예정에 없이 무릎을 꿇고 잘못된 역사를 사죄하였다. 독일 국민의 여론은 ‘지나쳤다(48%), 적절했다(41%), 무응답(11%)’으로 갈라졌다. 그러나 이후 독일은 주변국으로부터 신뢰를 얻기 시작했다. 한 국가 지도자의 올바른 판단과 결단이 국격을 높인 것이다. ‘반성할 만큼 했으며, 얼마나 더 반성해야 하는가’라고 반문하는 일본 지도자들에게 빌리 브란트와 같은 통 큰 용기를 기대하는 것은 한낱 환상에 불과한 것일까.
이규영 서강대국제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