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개통된 지리산 2·3차 구간, 넓히고 새로 뚫고… 지자체, 둘레길 ‘역주행’
입력 2011-08-16 17:39
최근 한 등산잡지의 부록에 ‘전국 걷는 길 가이드’가 실리자 그달 잡지가 사상 처음 동이 났다고 한다. 잡지 편집진들도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다. 안동 퇴계오솔길, 토영이얏길, 증도모실길, 변산마실길, 담양 오방길, 광주 무돌길 등 이름도 생소한 길들이 우후죽순 조성됐다. 그러나 ‘걷는 길’ 열풍은 그림자도 짙다. 국립공원 안과 밖, 자연과 조경을 가리지 않는가 하면, 편의시설을 너무 많이 설치하고 있다. 중앙부처와 지방자치단체가 원칙 없이 너도 나도 ‘걷는 길’ 조성에 나서면서 생태계 훼손과 농촌 공동체 파괴 조짐도 보인다.
◇농촌 마을길의 정취=전남 구례군 서시천변에 원추리는 지고 없었다. 지난 12일 지리산 둘레길 2차 개통구간 답사를 구례읍 안내센터에서부터 시작했다. 서시천에서는 봄과 여름 은어가 잡히고 합수부나 보가 설치된 곳에서는 왜가리가 물고기 사냥에 여념이 없다. 이곳은 수달의 서식처이기도 하다. 구례는 지리산 자락이면서도 기름진 평야가 많아 물산이 풍부한 곳임을 실감한다.
6㎞에 이르는 긴 제방길은 시멘트나 아스콘으로 포장돼 있다. 철따라 벚꽃, 돌복숭아꽃, 원추리 등이 반겨주는 서시천 꽃길이지만 큰 나무가 없어 땡볕을 받으며 걸어야 한다. 노인, 주로 할머니들이 밭일을 하고 있는 광경을 자주 볼 수 있다. 호박, 깻잎, 옥수수, 고추 등등…. 구례구간은 농로를 따라 농촌 마을을 가로지르는 길이 많다. 지리산둘레길을 기획한 사단법인 ‘숲길’ 관계자는 “처음에는 지리산을 한 눈에 조망하며 걸을 수 있는 길을 조사했지만 19번 국도 확장공사와 고속도로 공사로 국립공원에 가까운 마을을 잇는 길이 되고 말았다”고 말했다.
걷다보면 광의면 연파마을에 도착한다. 느티나무 보호수 앞에서 물을 한 모금 마시고 구만마을의 구만저수지로 향했다. 저수지 끝의 우리밀체험관을 거쳐 온당마을, 난동마을까지 마을길도 포장된 곳이 많아 지겨운 느낌이 드는 것을 피할 수 없다. 비교적 전통 방식으로 농사를 짓는다는 구례에서도 마을길이나 임도의 포장률이 높아지고, 많은 고갯길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역사와 함께 하는 길=지리산둘레길 가운데 지난 5월 개통된 구례와 하동 일부 및 산청 일부 구간에는 문화재가 많다. 이번 2차 조성 구간부터 지자체가 둘레길 조성을 위한 부지를 내놓고 코스 기획에도 참여하면서 기존 관광지와의 연계가 강조됐다. 구례군 김정현 산림과장은 “아무리 좋은 곳이라도 땅주인이 반대하면 수용여력이 없어서 포기해야 했다”고 말했다.
토지면 오미리에 있는 운조루는 조선영조 52년(1776년) 삼수부사를 지낸 유이주 선생이 말년을 보내려고 지은 집이다. 대구출신인 그는 경관이 수려하고 풍토가 후덕한 이곳에 99칸짜리 집을 지었다. 그 가운데 55칸이 남아 있다. 향토사학자인 권순목(지리산국립공원사무소)씨는 “유씨 집안은 매년 수확의 20%를 춘궁기에 마을 주민에게 나눠줬다고 한다”고 말했다.
11일 경남 산청군 수철마을부터 새로 이어진 둘레길 구간으로 갔다. 산청읍 어천에서 해발 1000m가 넘는 웅석봉을 거쳐 단성면 운리로 이어지는 길에 단속사지(址·터)가 있다. 단속사지에는 신라계 9세기 석탑의 전형인 삼층석탑 두 기가 남아 이 곳에 큰 절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단속사는 실상사와 함께 평지에 세워진 대표적 절로서 정유재란 때 거의 소실됐다.
둘레길은 운리에서 백운계곡을 거쳐 천왕봉을 바라보며 덕산으로 이어졌다. 산청군 시천면 사리에 있는 남명 조식선생 기념관에는 서책과 유품들이 전시돼 있다. 길 건너편 산천재는 남명 선생이 거처하던 곳이다. 남사리 예담촌은 안동 하회마을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는 전통 한옥마을이다.
◇1차 조성구간과의 비교=구례·하동·산청 신규 조성 구간은 농로와 마을길의 비중이 높다. 임도나 포장도로를 걷는 구간도 많아 전체적으로 1차 구간보다 단조롭고 지겨운 느낌을 준다. 마을 사람이 다니던 숲길을 추가해 단조로움을 깨려고 했다. 그러나 조성기간이 짧아서 그런지 옛길다운 예쁜 곡선과 정겨움을 느끼기는 어려웠다.
지리산둘레길 1차조성 구간을 기획한 지리산권 활동가 윤정준씨는 “지자체들이 둘레길에 간여하면서부터 곡선의 길이 안 나온다”면서 “중장비를 동원해서 직선으로 윤곽부터 잡는다”고 말했다. 윤씨는 “1차 구간을 조성할 때에는 사람이 지게를 지고 올라가서 돌 하나까지 손으로 작업했다”고 말했다.
산청과 구례구간의 둘레길을 차를 타거나 걸으면서 띄엄띄엄 돌아보는 동안 최근 내린 많은 비로 유실된 구간이 더러 눈에 띄었다. ‘숲길’의 이상윤 상임이사는 “옛 길을 찾아 복원한 곳은 큰 비에도 잘 견뎠지만 새로 낸 길과 절개지를 만든 구간은 많이 무너졌다”고 말했다.
‘숲길’ 인월안내센터에 따르면 지난해 8월까지 월 1만∼3만명 수준이던 방문객이 KBS ‘1박2일’ 프로그램 방영 후인 9월 10만5000명, 10월 14만명으로 늘었다. 지난해 46만4000명이 방문해 77억3000만원의 숙식소득을 올렸다. 물론 그 후 탐방객이 줄어 최근에는 월 3만명 안팎을 유지하고 있다. 신현주 센터장은 “마을 사람에게 일시적 탐방수요에 혹해서 민박집을 증측하지 말라고 권고한다”고 말했다.
1차 조성구간인 남원시 상황마을에서 등구재로 가는 고갯길에는 등구령 쉼터와 황토방 민박식당이 있다. 1박2일 출연 연예인 사진을 현수막으로 내건 황토방의 상인은 “지난해 9월 주말에는 하루 손님이 2000여명에 이른 날도 있다”고 말했다. 황토방 바로 뒤에는 펜션을 짓는 공사가 한창이다. 이 지역 환경운동가는 “둘레길 주변 노점상이 늘고 외지인에 의한 펜션 등 개발이 이뤄지면서 땅값이 오르고 농사지을 땅이 줄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둘레길은 지자체에게는 좋고 농민에게는 나쁜 것이 되고 있다”면서 “여관이라도 지을 수 있는 주민은 좋지만, 그렇지 못한 주민은 소외됨으로써 농촌공동체를 분열시킬 조짐마저 보인다”고 덧붙였다.
구례·남원=임항 환경전문기자 hngl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