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개발 심각… ‘국가탐방로제’ 도입 급하다

입력 2011-08-16 17:39

전 국민적 걷기 열풍에 편승하는 데 한 발이라도 늦을세라 각 중앙부처와 지방자치단체는 길 만들기를 서두르고 있다. 지리산권 환경운동가 윤정준씨는 “지자체들이 길을 찾는 게 아니라 만든다”고 지적했다. 자연스러운 옛길을 복원하는 대신 조경에 지나치게 많은 돈을 쓰고 편의시설을 너무 많이 설치한다는 것이다. 지금대로라면 잊혀진 옛길을 찾아내 속도전에 지친 사람에게 느림의 정신과 생활양식을 되찾게 하자는 취지는 자칫 무색해진다.

정부 부처의 탐방로 조성계획을 종합하면 2019년까지 9004㎞의 탐방로가 생긴다. 통계에 잡히지 않는 지자체 계획까지 더하면 1만㎞의 걷는 길이 새로 생길 판국이다. 윤씨는 “흙길을 시멘트로 덮고 필요 없는 곳까지 데크를 설치하는 바람에 조경업자와 목재데크 수입업자들이 특수를 누리고 있다”고 말했다.

가장 큰 문제는 국립공원 안과 밖, 각종 보호지역을 가리지 않고 둘레길이 조성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변산반도·다도해·한려해상 국립공원에서는 지자체들이 공원법을 위반해가며 공원 내 비법정탐방로를 ‘걷는 길’로 지정하는 경우도 있다. 국립공원관리공단은 어떤 경우에는 허용하고, 다른 경우에는 불허하는 등 원칙 없이 대응하고 있다.

사업시행자가 충분한 사전답사 없이 길을 만든다는 점도 문제다. 경남 통영 미륵산해안길은 트럭도 지나다닐 수 있도록 과다포장한 사례다.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전남 여수 금오도 비렁길과 가장 긴 해안데크를 설치한 전남 영광 노을길은 걷는 길 조성이 해안경관을 훼손한 것으로 지적받고 있다. 북한산 둘레길에는 목책시설물이 너무 많다.

생태계 훼손우려도 무시할 수 없다. 걷는 길을 닦을 때 중장비부터 동원하면 바퀴 간 길이만큼 길이 넓어져 야생동물의 이동과 휴식을 방해한다. 전국물새네트워크 이기섭 대표는 “지나치게 넓은 둘레길은 꿩이나 종다리처럼 땅바닥에 알을 낳는 조류에게는 치명적”이라고 말했다. 이 대표는 지난 3월 22일 열린 우이령포럼에서 발제문 ‘둘레길의 생태적 문제점’을 통해 “둘레길은 산 위와 아래를 오가는 포유류의 이동을 방해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해안을 따라 이동하는 강화둘레길과 제주올레길 성산포 구간은 도요·물떼새류, 청둥오리, 물닭 등 철새의 휴식처를 박탈한다”고 말했다.

탐방객의 에티켓도 도마에 올랐다. 지리산 둘레길 2차 조성구간에도 고추밭과 고사리, 감, 밤 등 농작물이 마을길 옆에 널려 있다. 올 가을 탐방객들이 서리를 할 우려를 떨쳐버릴 수 없다. 실제로 인월∼금계∼동강 등 1차 조성구간 곳곳에는 ‘고사리를 따지 마세요’라는 호소문이 걸렸다. 공중화장실, 주차장, 정자 등 편의시설을 너무 많이 설치해 경관을 망치는 점도 지적됐다.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에는 화장실이 없다. 윤씨는 “일관성 없는 중구난방식 걷는 길 개설과 중복 투자가 문제”라며 “중앙정부가 통합적으로 관리·운영하는 전국 단위의 국가탐방로 지정제도를 도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남원=임항 환경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