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제2의 존 스토트가 필요하다

입력 2011-08-15 10:07


[미션라이프] 제2의 존 스토트 목사들이 벌떼처럼 일어나기를 기도 한다

김상복 목사 할렐루야교회 원로, 세계복음주의연맹(WEA) 회장


최근에 천국으로 떠나신 존 스토트 목사님은 세계복음주의 운동의 두 기둥 중 하나임은 지난 해 10월 남아프리카 케이프타운에서 모인 제3회 로잔대회에서도 분명이 드러났다. 참석자 모두는 빌리그레함 목사와 존 스토트 목사를 세계복음주의 운동의 두 기둥으로 추앙했고 존 스토트 목사는 세계복음주의연맹(WEA)의 신앙고백과 로잔언약을 초안하여 철저하게 성경에 근거한 복음주의신앙 운동의 신학적 토대를 확고하게 하는 데 가장 확실한 공헌을 했다.

존 스토트 목사는 로날드 내쉬라는 캠퍼스 미니스트리 간사를 통해 복음을 듣고 고등학생 때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거듭난 경험이 있었다. 그 이후 캠브리지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는 동안에도 그에게 신학교수들의 영향은 거의 없었고 내쉬의 개인적 지도를 계속 받으며 IVF사역에 참여했고 신학공부를 마쳤다. 내쉬는 캠퍼스 사역의 중요성을 존 스토트를 통해 확증했고 그 영향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주었다.

스토트 목사 자신의 자서전에 의하면 그 분이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던 1940년 대에는 영국의 저명한 대학들에는 복음주의 신앙을 소유한 신학교수는 한 명도 없었고 모두가 자유주의 신학자들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스토트 목사가 60세가 되었을 때는 전국에 50명의 복음주의 신학자들이 대학에서 가르치고 있었다고 한다. 제2차 대전 이후 많은 변화가 신학계에 일어났다. 그 한 복판에 올소울즈교회를 담임하며 꾸준히 성경적 설교와 철저하게 성경에 기초한 수많은 저서를 통해 복음주의적 성경해석과 신학강의를 계속하며 세계교회와 신학계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복음주의의 가장 큰 특징은 복음과 성경관이다. 성경관에 따라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며 어떤 신학이 흘러나올 것인지 결정되기 때문이다.

이미 오래전 타계했지만, 존 스토트 만큼 기독교계에 큰 영향을 끼쳤고 로잔언약을 작성할 당시 존 스토트와 함께 초안을 작성한 프란시스 쉐이퍼 목사가 제1차 로잔대회 당시 선언한 대로 ‘성서론은 기독교의 분기점’(Bibliology is the watershed of Christianity)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복음주의자들은 성경을 철저하게 믿고 받아드린다. 존 스토트 목사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존 스토트 목사의 신앙과 신학은 언제나 성경적이다. 성경을 의심하거나 부인하는 것은 그의 신앙이 아니었다.

그는 성경을 신학적으로 통달한 분이었다. 그의 수많은 저서 중 어느 한 권도 성경의 가르침에서 벗어난 내용이 없다. 그의 설교는 완전히 성경적이면서 성경적 이해로 가득 찬 영성에서 열정적으로 쏟아져 나오는 메시지들이었다.

존 스토트 목사는 한국에 두 번 온 적이 있었다. 여러 차례 한국에 초청을 했지만 통역을 두고 설교하는 것을 싫어하는 스토트 목사님 주로 세계의 영어권의 초청만을 받아드렸다. 통역은 자기의 메시지를 끊어 생각의 흐름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국에 처음 왔을 때에 그를 초청하면서 새를 극히 좋아하는 그에게 한국의 DMZ에 가면 새로운 새들이 많이 있다는 말에 관심이 생겨 한국 방문을 받아드렸고 한국의 새전문가를 동행시켜 DMZ를 방문케 한 적이 있었다.

나는 귀국하기 전 1989년 필립핀 마닐라에서 모인 제2차 로잔대회에서 존 스토트 목사를 처음 개인적으로 함께 점심을 나눈 적이 있었다. 그 이후 론돈 자택에서 만나 교제한 적이 있었고 그 분이 한국에 왔을 때 통역 부탁을 받고 존 스타트 목사의 설교를 통역한 적이 있었다. 그 통역의 경험을 통해 느낀 것은 존 스토트 목사의 설교와 스타일에 대한 강한 인상이었다.

그의 설교는 끊임없이 빠르게 쏘아대는 기관총과 같은 강열함이 있었다. 아마도 내가 대학교 3학년이었던 20세부터 통역해 본 수많은 유명한 영어권 연사들 중 가장 강열한 연사인 것 같았다. 통역하기 가장 어려운 분으로 기억에 남아 있다. 특히 그의 설교는 너무도 완벽하게 성경적이어서 통역자요 목사인 나에게 통쾌감과 순수한 기쁨을 제공해 주었다.

설교 통역을 마쳤을 때 나의 영혼이 깨끗하게 목욕한 것 같은 상쾌함과 깊은 환희를 체험했다. 종종 목사들의 설교에 들어있는 잡다한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것들이 없는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의 확실한 선포였다. 나는 일생 두 번 이런 설교를 듣고 환희와 만족을 느껴본 적이 있었다.

한 분은 영국 스퍼전신학대학 총장 해롤드 브라운 목사의 설교였고 두 번째가 존 스토트 목사의 설교였다. 이런 설교자는 인간의 영혼을 흔들어 살려낸다. 존 스토트 목사가 너무도 그립다. 영국의 교회는 끝없이 쇠퇴해 가고 있으나 스토트 목사가 목회를 하던 교회는 계속적으로 성장했고 영국교회에 영향을 기쳤다. 이번 장례식에 참석했던 영국교회 대주교도 그의 영향을 받은 분이다.

스토트 목사는 담임목사요 설교자였으나 신학자였다. 결혼을 하지 않아 시간의 여유가 있었고 월요일이 되면 그는 바닷가에 있는 그의 자그마한 별장으로 가서 계속 집필해 전념했다. 그는 TV를 거의 보지 않았고 주로 라디오를 들었다. 그 이유는 TV는 앉아서 보아야 하나 라디오는 샤워를 하면서도 뉴스를 들을 수 있어 시간 낭비가 없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쇠태해 가고 있는 영국교회, 신학적으로 좌경화 된 영국교회에 속해 있으면서도 지엽적인 문제로 영국교회를 공격하거나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비판적이고 부정적인 접근을 하지 않았고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 없이 열정을 다 해 그대로 선포함으로 영국과 세계에 성경적 복음주의를 확장시켜 갔다. 이 점에 있어서는 빌리그래함 목사와 유사한 점이 있다. 이제 존 스타토 목사는 우리 곁을 떠났다.

그 빈자리가 너무도 크다. 그러나 그가 남긴 많은 저작은 기독교계의 큰 유산이다. 20세기와 21세기에 세계복음주의운동의 두 기둥 중 하나인 빌리그래함 목사도 95세 이르면서 쇠해 가고 있다. 복음주의 신앙과 신학은 성경에 기초했기 때문에 흔들림이 없고 복음주의교회들은 전 세계에서 계속 성장하고 있다. 역사적, 전통적, 성경적 복음주의 신앙과 신학만이 영혼을 살리고 교회를 살린다.

성령의 영감으로 쓰여진 하나님의 말씀과 성육신화 되신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흔들리지 않는 그 중심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명예나 부나 지위나 개인적인 영향력을 추구하지 않았다. 그런 것은 그에게 관심 밖의 것들이었다. 그에게는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가 중요했다. 지엽적인 문제로 논쟁이나 분파나 교회정치에 빠지지 않았다.

그는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영원한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에 적극적으로 인생을 걸었다. 그래서 진리의 상징이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거듭나 새 사람이 된 복음적 신앙인과 복음을 위해 소명을 받은 목회자와 신학자들은 다 함께 일어나 존 스토트 목사의 빈자리를 채우며 주님오실 때까지 퇴색되지 않을 영원불멸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하나님의 말씀을 존 스토트 목사님처럼 열정적으로 타협 없이 현대인에게 전하며 계승할 새로운 존 스토트들이 전 세계에서 벌떼처럼 일어나 이 땅을 하나님의 나라로 변화시키는 데 쓰임 받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