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희조 (8) 집에서 시작된 개척교회 장로가 되다
입력 2011-08-14 18:10
나는 할머니 때부터 감리교회를 다녔지만 결혼 후엔 예장(대한예수교장로회) 교회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처와 장인 한상룡 장로가 예장에 속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6·25전쟁이 채 끝나기 전에 분열의 움직임이 감지됐다. 신학적 입장, 지역적 입장 차이 때문인 것으로 보였다. 언젠가 대전 집에 내려갔는데 10여명의 교인이 우리 집에서 예배를 보겠다고 모여 있었다. 전주의 한 목사가 장인에게 ‘대전에 교회를 세우려고 하는데 기왕이면 당신 사위집에서 시작하면 어떻겠느냐’고 해서 모였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대전 문화동 도청 뒤에서 교회를 개척했다. 장로가 없던 터라 내게 강권을 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장로 임직을 하게 됐다.
이후 군을 제대하고 충주비료공장 이사로 서울에서 근무할 때 기장 교회인 서울성남교회를 다니게 됐다. 교회가 자리한 서울역 맞은편의 동자동은 당시 ‘양동골목’이라는 유명한 사창가였다. 불량배가 많이 살았고, 지금도 쪽방촌이 있다. 다른 교단의 어떤 교회보다 먼저 서울성남교회가 구제 사업을 시작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당시 담임이었던 이해영 목사가 처음 구제 사업을 시작했다.
활발한 사역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잘 성장하지 못했다. 어려운 지역 분위기 때문이기도 했다. 교회가 지역주민들을 전도해 교회로 인도하면 처음엔 교회에 잘 다니다 형편이 나아지면 이사를 가는 게 흔한 일이었다. 지금도 무료급식, 노인대학 등 지역주민들을 위한 다양한 사역을 이어오고 있다. 은퇴한 지 오래된 장로가 됐지만 지금도 노인대학 강사는 여전히 하고 있다. 아흔을 코앞에 둔 노인의 활기찬 강의에 많은 노인들이 ‘할 수 있다’는 의지를 갖게 되는 것 같아 감사할 따름이다.
송창근 목사가 설립한 서울성남교회는 원래 천리교 본부 자리에 자리잡고 있었다. 미국 군정청이 되면서 일제 때 재산을 분배했고, 그걸 송 목사에게 준 것이다. 영락교회와 경동교회 터도 송 목사가 미 군정청으로부터 받아 각각 친분 있었던 한경직 목사와 김재준 목사에게 나눠줬다. 꾸준히 성장했던 영락교회나 경동교회와 달리 서울성남교회는 광복 1년 만에 화재로 전소되고, 송 목사도 6·25 때 납북되는 바람에 어려움이 많았다. 만약 송 목사가 납북되지 않았다면 교단 분열도 없고, 서울성남교회는 훨씬 위상이 높아졌을 것이다.
경건과신학연구소 이사장을 맡은 적이 있다. 연구소는 송창근 목사와 그의 제자 김정준 목사를 기념하기 위해 1999년 설립한 것이다. 경건과 학문의 조화로운 삶을 살다 간 두 분의 뜻을 기리기 위한 연구소다. 한신대 총장을 했던 주재용 목사가 김 목사의 매부였다. 주 목사가 한신대 총장을 그만둔 뒤 연구소 초대 소장을 했고, 내가 초대 이사장을 했다. 연구소 사무실이 필요했는데 서울성남교회 배태덕 목사가 선뜻 내줬다.
하지만 기존 건물도 좋다는 교인들의 반발도 없지 않았다. 결국 내가 이사장을 맡아야 한다는 배 목사의 설득에 내가 이사장직을 수락했다. 지금은 배 목사가 이사장을 맡고 있다. 1년에 두 차례 공개 강연을 한다. 경건, 영성과 관련 신학대학 논문 등 자료 수집과 출판을 하고 있다. 후학을 양성하기 위한 장학 사업도 하고 있다.
정리=김성원 기자 kernel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