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기억’ 꿈 형식 빌려 환상적 묘사… 이진주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展

입력 2011-08-14 17:25


한국 현대미술을 이끌어갈 차세대 작가로 주목받고 있는 이진주(31)는 네 살 때 경남 김해 낙동강 근처로 친구들과 개구리를 잡으러 갔다가 재미없어 혼자 집에 돌아오는 길에 어떤 남자에게 납치당할 뻔했다. 너무 어려서 아무것도 모르는 나이였기에 무섭지도 않고 뭐가 뭔지도 모르고 그냥 순간적으로 집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에 막 도망을 쳤다고 한다.

홍익대 동양화과에 진학한 그는 어릴 적 상처로 남은 기억을 또 다시 만나게 된다. 늦은 밤 자취방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누군가가 뒤에서 머리를 잡아끌며 성폭행을 시도한 사건, 대학 친구가 동네 불량배에게 폭행당해 죽은 사건 등 뉴스에 나오는 장면들을 겪었다. 나중에 경기도 고양시 행주에서 살았는데 뭔가 불안한 환경이 이전의 경험을 떠올리게 했다.

지금은 파주에서 작업하는 작가는 이런 기억들을 화면에 옮긴다. 작업실 주변의 환경 역시 쓰레기가 널려 있거나 하수구가 밖으로 흘러내리는 등 이전의 상황과 다를 바 없다. 잊으려 해도 잊혀지지 않는 삶의 순간들을 세밀하면서도 환상적으로 표현하는 그의 개인전이 서울 사간동 갤러리현대의 프로젝트 전시공간인 ‘16번지’에서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이라는 제목으로 9월 11일까지 열린다.

그의 작업은 마음 속 깊이 유폐시킨 내면의 상처들을 끄집어내는 것으로 출발한다. 20여점의 출품작 중 ‘경계의 계절’은 눈 쌓인 땅 위로 종이가 흩날리고 도로 표지판과 이동식 화장실이 놓여 있으며 앙상한 나무가 서 있는 풍경이 삭막하기 그지없다. 작가는 “삶은 떠돌지만 기억은 머물기에, 불편한 과거의 진실들을 똑바로 응시하고자 한다”고 설명했다.

‘순환’ ‘어제의 거짓말’ 등 대부분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은 작가의 자화상이다. 그림 속 인물이 옷을 걸치지 않은 것은 “굳이 옷을 입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란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통해 인물이 처한 환경을 드러내는 셈이다. ‘검은 눈물’의 배경에는 ‘27’이라는 숫자가 적힌 달력 한 장이 걸려 있다. 힘들었던 스물일곱 살 때의 기억을 표현한 것이다.

“마르셀 푸르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으며 너무 공감했어요. 잠이 덜 깬 꿈속인지 의식의 시작점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런 순간순간을 자세하고 정확하게 묘사해 실감이 나더라고요. 이렇듯 우리가 다 알고 경험하는 것이지만 인식의 체계에서 미처 눈치 채지 못했던, 낯설고 오묘한 지점을 깨닫게 해주는 예술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매일 접하는 현실과도 같은 기억의 조각들을 꿈의 형식을 빌려 표현하는 그의 작품을 보면 다소 불편하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하다. 그렇지만 희망의 빛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의 바깥’에서 보듯 나뭇가지에는 초록 잎이 돋아나고 어린 아이들이 기어 다니는 모습이 새로운 이미지로 다가온다. 그것은 현재 임신 8개월째인 작가의 희망찾기가 아닐까(02-2287-3516).

이광형 선임기자 g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