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기독교 성지 순례] 첫 수녀 ‘이부비’ 낳은 여성 선교의 산실
입력 2011-08-14 18:02
(24) 성공회 성가수녀원
서울 정동에 있는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가다 보면 대한성공회 주교좌 성당 뒤 붉은 벽돌로 지어진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성가수녀원이다. 오래된 기와지붕위에 현대식으로 증축한 건물이다. 주교좌성당과 함께 90년 가까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이곳은 최초의 한국인 성공회 수녀를 양산한 여성 선교의 산실이다. 한국 수녀회 설립의 어머니라 할 수 있는 클라라 수녀와 한국 최초의 한국인 수녀 이부비의 숨결이 담겨 있는 곳이다.
여성선교의 모태
“이곳에 여성을 위한 인력이 필요합니다.” 1889년 대한성공회 초대 주교 존 코프는 영국의 ‘성베드로수녀회’에 여성 선교를 위한 인력을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선교활동을 하려 해도 외국인에 남성이었기에 당시 한국 여성들에게 다가가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성베드로수녀회는 1892년 5명의 수녀를 한국으로 보냈다. 파송된 수녀들은 여성선교관을 열고 여전도사들을 모집해 훈련시켰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도 역시 어려움은 있었다. 아무리 같은 성별이라도 언어가 다르고 외모가 달랐다. 수녀들도 한국의 문화를 100% 이해하기는 힘들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대한성공회는 수녀회 설립을 원했다. 1925년 마침내 그 첫 걸음이 시작됐다. 대한성공회 제3대 교구장 조마가 주교는 ‘성 십자가 수도회’를 창설하고, 여기에 이후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이부비가 입회한다. 같은 해 9월 마침내 ‘성베드로수녀회’의 기본 정신인 청빈 절조 복종을 바탕으로 현재 자리에 성가수녀원이 설립됐다.
초대 원장에는 마리아 클라라 수녀가 선임됐다. 클라라 수녀는 성가수도회의 기본 방향을 ‘전도활동’으로 규정했다. 주 내용은 신자의 심방과 신앙교육, 예비 신자의 교리교육, 주일학교의 교육, 보육원 지원 등이었다. 35년 6월, 이부비는 종신서약을 하고 한국인 최초의 수녀가 됐다.
6·25전쟁을 겪으며 클라라 수녀는 순교하고 성가수녀원은 건물이 파괴된다. 그러나 60년 대한성공회는 수녀원 건물을 신축하고, 66년 손 모니카 수녀의 종신서약을 시작으로 69년에 성가수녀원 역사상 처음으로 다섯 명의 수녀가 함께 종신서약을 하면서 다시 활력을 찾는다.
성가수녀원 수녀들은 클라라 수녀가 강조한 전도활동에 초점을 맞춰 69년부터 75년까지 서울 YMCA 종교부에서 성경공부와 특강 프로그램을 진행했으며 80년 세계교회협의회(WCC) 호주 멜버른 대회에 참석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했다.
성가수녀원은 현재 서울뿐 아니라 경기도 강화와 충북 청주에 분원이 있다. 서울 본원에는 20여명의 수녀들이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여성 지적장애인과 노인들을 돌보고 있으며 관상기도와 렉시오디비나(말씀묵상)를 통한 영성수련에 힘쓰고 있다. 성가수녀원 알마 원장은 “앞선 선배님들의 헌신과 노력이 굳건히 뿌리내린 결과”라며 “앞으로도 이웃을 섬기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을 사랑한 마리아 클라라 수녀
초대 원장인 클라라 수녀는 1883년 아일랜드에서 출생했다. 그녀는 전문교육을 받은 여성으로 어학과 미술에 재능을 갖고 있었다. 성공회 가정에서 자란 그녀는 영국 버밍엄대학교를 졸업한 뒤 1913년 성 베드로 수녀회에 입회하고, 15년에 수녀 서약을 했다. 수녀회에 입회하기 전에는 조마가 신부가 관할하는 교회 일을 도왔고, 후에 런던 킬번에 있는 성 어거스틴 교회에서 봉사했다. 그러던 중 23년 대한성공회에서 시무하던 조마가 신부는 클라라 수녀를 한국으로 불렀다. 그녀는 입국해 한국어를 공부한 뒤 기도서 번역, 수도회 성무일과와 수도회 규칙 및 행사 책자를 만들었다.
그녀는 성가수녀회 설립에 대들보 역할을 하고 초대 원장으로 취임했다. 40년 제2차 세계대전 중 선교사 강제 출국 조치로 클라라 수녀는 영국으로 출국했다. 그러나 그녀는 영국에서도 한국을 잊지 못했다. 8시간의 시차가 났지만 한국에 있는 수녀들이 기도하는 시간에 맞춰 성무일과를 드렸다.
클라라 수녀는 47년 1월 20일 다시 입국했다. 그러나 3년 후 6·25전쟁이 발발한다. 50년 7월 클라라 수녀는 북한군에 납치됐다. 유치장에 있는 동안 식사는 하루 중 꽁보리밥 한덩어리가 전부였다. 물도 조금밖에 주지 않아 갈증을 견디기 어려웠다. 납치된 외국인들은 밤중에 기차에 올라 평양으로 보내졌다.
평양에서 하룻밤을 자고 만포진에서 만난 미군 포로 750여명과 함께 평양, 만포진, 고산, 수산리, 하장리 등을 거쳐 압록강포로수용소로 가는 160㎞를 이동했다. 이른바 ‘죽음의 행진’이라 불리는 이 길에서 추위와 배고픔, 모진 학대를 이기지 못하고 50년 11월 6일 클라라 수녀는 순교했다.
대한성공회 교무원장 김광준 신부는 클라라 수녀가 한국에 수도원 영성이 뿌리내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했다. “클라라 수녀는 성가수녀원이 한국인의 수녀원이 돼야 한다고 적극 주장하셨습니다. 이부비 수녀가 종신 서약을 하자 곧바로 원장 자리를 넘기셨죠.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이 나라를 사랑하고 섬기셨습니다.”
글·사진=이사야 기자 Isaia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