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괴한 상상력으로 현실 이면의 어둠을 환기시키다… 구병모 소설집 ‘고의는 아니지만’
입력 2011-08-12 17:48
지루하고 밋밋한 일상, 어제는 그제와 같고 오늘은 어제와 같은 천편일률적 현실은 인간을 가렵게 한다. 그래서 현실의 감성은 늘 득득 긁고 싶고 무엇인가가 일어나기를 간절히 갈망한다.
2009년 등단이라는 짧은 이력에도 불구, 20만부 이상의 판매고를 올린 장편 ‘위저드 베이커리’와 ‘아가미’를 통해 ‘구병모식 환상’이란 스타일을 확고히 굳힌 소설가 구병모(35·사진). 그의 첫 소설집 ‘고의는 아니지만’(자음과모음)은 이런 갈망에 부응하듯 7편의 작품마다 기괴한 상황과 사건을 만들어낸다. 현실을 비틀어 또 다른 현실을 가공해 내는 그의 문체는 허황한 판타지가 아니라 현실 이면에 드리운 어둠을 환기시키는 강력한 폭발력을 내장하고 있다.
소설집에 등장하는 사건은 이렇다. 논문 대필로 생활비를 버는 주부는 24시간 칭얼거리는 아이에 시달리다 결국 세탁기에 넣고 돌려버린다(‘어떤 자장가’). 담임교사에게 실컷 두들겨 맞은 소년은 무엇이든 꿰매준다는 가게에 들어가 감각을 일으키는 세포를 모두 꿰매 버린다(‘재봉틀 여인’). 술에서 깨 보니 인도 한가운데 푹 꺼진 주물 속에 하반신이 박혀 꼼짝 못한다. 이유는 모른다(‘타자의 탄생’). 새떼가 갑자기 사람을 공격해 죽을 때까지 뜯어 먹는다(‘조장기’). ‘식량전쟁을 겪은 S도시는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언어 사용에서 비유를 금지하는 법을 만든다(‘마치…같은 이야기’).
‘타자의 탄생’을 읽어본다. “그는 복부부터 하반신 전체가 인도 한복판에 깊이 처박혀 있었고 오른손은 밖에, 왼손은 하반신과 함께 땅속에 들어가 있었다. 그리고 자기 몸을 중심점으로 하여 성분 모를 크롬색 금속이 찌그러진 원 모양으로 퍼져 나간 채 굳어 있었다.”(48쪽)
‘타자의 탄생’이 보여주는 사건은 너무도 기괴한 것이어서 적어도 현실의 층위에서는 역추적이 불가능하다. ‘그’는 사막에 떨어진 운석처럼 이질적인 모습으로 지상에 박혀 있다. ‘그’는 기억을 되살려보지만 그런 일을 당할 만큼 타인에게 원한을 산 적도 없다. 그러나 절대적인 우연이랄 수밖에 없는 이 사건을 통해 ‘그’는 자신의 과거의 현재의 삶을 전면적으로 되돌아본다.
‘그’는 취재를 나온 기자에게 정신을 가다듬은 채 마지막 말을 내뱉는다. “구멍은 어디에나 있어요.” 구조가 불가능한 타인의 불행은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사건이기도 하다. 이런 우발적 사건들은 표층적 현실을 파열시키는 동시에 현실의 구조를 뒤흔든다. 비록 우연에 기대고 있지만 그 우연성은 복합적인 현상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 가운데 하나라는 점에서 또 하나의 필연성에 다름 아니다.
구씨는 “이 소설들은 나를 둘러싼 세계에 대한 내밀한 고해성사인 동시에 보속으로 간주하려는 치밀함의 산물”이라며 “치밀함이 한 글자만 바꾸어 치열함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정철훈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