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신학강좌] 교회의 역사

입력 2011-08-11 18:13


분리주의파 청교도운동(1) - 신앙의 자유위해 미국으로

분리주의파 회중교회운동(Congregationalism)은 각개 교회의 독립과 자율성에 근거한 교회치리 형태로 교회 운영의 민주주의를 부르짖고 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유일한 머리요, 모든 회중은 하나님께로 부르심 받은 사제들이라는 신앙에 기초하고 있다.

로버트 브라운(1550∼1633)은 캠브리지대학교 학생이었는데 1572년 졸업 후 분리주의 원리를 채택하였다. 브라운은 노르위치에 독립회중을 모았던 로버트 해리슨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브라운은 그의 설교 때문에 여러 차례 감옥을 들락거리고 유배를 당하면서 폭풍 같은 시련과 역경의 인생을 살았다. 브라운과 그의 회중은 네덜란드 미델버그에서 안정을 추구하였다.

그는 참 교회는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체험적 신도들의 개체교회 공동체뿐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자발적인 계약에 의해서 그리스도에게 연합하고 회중 서로가 연합하는 회중 공동체를 강조하였다. 각 개체교회는 자치 통치로 이루어지고 회중 스스로가 신약에 언급된 목사, 교사, 장고, 집사를 선택하며 또한 각 교인은 회중 전체의 이익을 위해 책임감을 가져야 된다고 하였다. 즉, 각 개체교회의 완전한 자율성을 강조한 것이다. 브라운은 영국으로 다시 돌아와 영국에 회중교회를 설립하고 목회하기에 이르렀다(1585∼1633). 브라운의 회중교회 운동은 평신도 헨리 바로우(1550∼1593)와 교역자 존 그린우드(?∼1593)에 의해 계승·발전되어 갔다. 그들은 런던에 회중교회를 설립했다는 이유로 체포당하게 되었는데 감옥에서 브라운보다 더 과격하게 분리주의 원리를 옹호하고 변호하였다.

결국 1593년 4월 6일 바로우와 그린우드는 그들의 교회론이 문제가 되어 왕의 권위를 부인했다는 이유로 목매달아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사실 1592년 런던에 프랜시스 존슨(1562∼1618)을 담임목사로 그린우드를 교사로 임명한 영국회중교회(English Congregational Separatists)가 설립되었는데, 바로우와 그린우드가 처형당하는 아픔을 겪게 되자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망명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영국 게인스보로우(Gainsborough)에 모였던 회중교회도 네덜란드로 망명하게 되자 영국 스그루비에서 평신도 장로 윌리암 브루스터를 중심으로 모였던 회중교회 또한 네덜란드로 망명하기에 이르렀다.

게인스보로우 회중교회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정착했고 스그루비 회중교회는 네덜란드 레이든에 정착하게 되었다. 네덜란드 레이든 회중교회의 담임목사는 영국국교 목사였다가 청교도가 된 존 로빈슨이었고 장로는 윌리암 브루스터였다. 결국 이 레이든 회중교회 교인들이 주축이 되어 신앙의 자유와 정치적 자유를 위해 102명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66일 동안 항해하여 1620년 12월 추운 겨울 미국 플리머스에 도착하게 되었다.

레이든 회중교회의 담임목사 로빈슨은 다수의 교인들 때문에 결국 네덜란드 레이든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고, 장로 브루스터가 미국 개척 청교도의 영적 지도자로 메이플라워호에 승선하게 된 것이다. 결국 목사가 아닌 평신도 중심의 미국 개척 청교도 운동이 되었다.

김홍기 총장 (감리회신학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