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문지방 넘기] ‘개’ 비유에도 예수께 매달린 여인… 그 큰 믿음이 죽어가는 딸 살려
입력 2011-08-11 17:42
아버지가 위암에 걸려 생사의 갈림길에 선 적이 있었습니다. 온 식구들이 병원에 모여 침통한 심정으로 치료 방법을 논의하고 있을 때 뜬금없이 어머니께서 ‘개 걱정’을 하셨습니다. 집에서 키우는 개가 한 마리 있었는데 굶으면 어쩌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병원에 급히 올라오느라 개밥 주는 것을 미처 누구에게 부탁하지 못하신 모양입니다. 누군가 말했습니다. “어머니, 지금 개가 문제요? 개밥이야 옆집에서 알아서 하겠지요.” 상황이 워낙 다급하다 보니까 개까지 챙길 마음의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때 ‘상갓집 개’라는 옛말이 제 머릿속에 떠올랐습니다. 초상난 집에서 개는 천덕꾸러기 신세입니다. 식구들 중에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 않고, 개밥을 챙겨주는 사람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배고프다고 낑낑거렸다가는 발길에 걷어차이기 십상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집안 식구들 맘이 심란한 판에 잘못 걸리면 분풀이만 당할 게 뻔합니다. 눈치껏 구석에 웅크리고 있다가 버려진 음식이 있으면 그것으로라도 배를 채우는 도리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두로 지방에 갔을 때 이방 여인 하나가 예수님을 끈질기게 따라오면서 자기 딸을 고쳐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웬일인지 예수님은 일언반구 대답이 없습니다. 한참 후에 마지못해 입을 열어서 하시는 말씀이 의외입니다.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막 7:27)
예수님은 이방 여인을 ‘개’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심히 모욕적인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종종 이방인을 개나 돼지로 비유했지만 예수님조차 이방 여인을 차별하는 것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입니다. 이게 예수님의 본심일까요? 예수님은 왜 이런 말씀을 하신 걸까요?
저는 이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개’를 ‘상갓집 개’로 바꾸어 읽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의 질문과 수로보니게 여인의 대답이 훨씬 실감나게 다가왔습니다.
상갓집 개는 가장 불쌍한 신세를 의미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외면당하고, 구박받고, 눈치를 보아야 하고, 밥도 제대로 못 얻어먹는 가련한 신세입니다. 모욕과 수치와 천대를 한 몸에 받는 것입니다. 아예 나 자신이 죽어 없어지는 것입니다. 자기 존재를 완전히 지워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딸을 살리기 위해 이런 희생을 각오하고 있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여인은 단호하게 대답합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는 먹나이다”(막 7:28). 딸자식을 고칠 수만 있다면 상갓집 개처럼 뭇 사람들에게 짓밟히는 일도 얼마든지 감수하겠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모욕을 참아내는 정도를 넘어서서 자신의 온 몸을 다 던져 희생의 제물이라도 되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의 말을 듣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막 7:29)
딸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기로 각오한 어머니의 믿음은 큰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딸을 살렸습니다. 한 이방 여인, 우리는 그의 이름을 모르지만 그 여인은 자식을 키우는 모든 어머니의 표상임이 분명합니다.
오종윤 목사 (군산 대은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