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존심 날개 달고 한국, 날았다… 첫 국산 민항기 ‘나라온’ 탄생
입력 2011-08-11 18:05
유선형의 미끈한 하얀 몸매가 8m에 달한다. 겨드랑이 좌우로 뻗은 날개는 11.3m. 이륙중량 1633㎏, 351마력의 엔진에 조종사를 포함해 4명이 탈 수 있다. 국내 최초로 개발된 민간항공기 KC-100, 일명 나라온호의 체형이다.
몸통은 다른 비행기와 달리 전체를 하나의 탄소섬유 복합체로 구성했다. 가벼우면서도 강도를 높여 생존성을 높이려는 의도였다. 중앙과 후방, 전방 동체를 각각 만들어 이를 조립하는 일반적인 방식과는 다른 선택이었다.
나라온은 ‘날아’를 소리 나는 대로 읽은 ‘나라’와 100이란 뜻을 지닌 순우리말 ‘온’을 조합해 만든 말이다. 최대 시속 389㎞, 최대 항속거리 1850㎞, 최고 고도 7.62㎞, 최대 연료량은 250ℓ로 1ℓ당 연비는 7.4㎞이며 7시간 비행이 가능하다. 도쿄까지의 거리가 1100㎞, 베이징이 950㎞, 타이베이가 1500㎞ 떨어진 점을 감안하면 일본 전역과 중국의 주요 도시, 동남아 일부까지 비행이 가능하다.
한국은 지난해 항공 여객수송량 세계 15위, 화물수송량은 세계 3위에 오르는 등 항공운송 시장에서 비중을 키워 가고 있다. 운송에 투입된 비행기 중 자체 제작 비행기는 없다. 우리나라는 일부 군용 부문에선 세계적 수준의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초음속고등훈련기 T-50을 제작해 인도네시아에 판매하는 등 세계에서 6번째로 군용기 수출국 반열에 올랐다. 하지만 민간항공기 개발 분야는 여전히 걸음마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나라온 개발로 한국은 세계에서 28번째로 민간항공기 개발 국가 명단에 이름을 올리게 됐다. 경남 사천의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을 지난 9일 방문해 김임수 상무, 고대우 민항기 체계팀장 등으로부터 나라온의 개발 뒷얘기를 들었다.
9인승 제트기냐 4인승 프로펠러기냐
민간항공기 개발 회사인 동시에 군용기를 제작하는 회사다 보니 공장 출입 절차가 까다로웠다. 취재를 위해 사전에 국방부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회사 정문에서도 일일이 신분 확인과 노트북, USB 소지 여부를 확인했다. 신분증과 출입증을 교환할 때도 나라온의 조립동으로 출입을 제한했다. 이렇게 까다로운 절차 끝에 나라온의 속살을 만져 볼 수 있었다.
당초 국토해양부와 KAI는 제트엔진이 달린 9인승 항공기를 만들 것인지, 프로펠러 추진의 4인승 항공기를 개발할 것인지를 놓고 고민했었다. 소형이지만 9인승 제트기를 만들면 중형 항공기(100인승 이하) 개발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개발비다. KAI가 인도네시아에 수출한 T-50은 개발기간 8년에 개발비만 2조4000억원이 들어갔지만 정부가 전폭적으로 지원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9인승 제트기의 개발비는 4000억원대지만 정부 지원이 없는 상태에서 강행하기는 어려웠다.
반면 4인승 프로펠러기는 개발비가 1000억원 이하로 줄어든다. 마침 정부는 항공 산업 선진화를 위해 대전에 있는 항공우주연구원에 민간항공기 제조에 대한 시험 및 인증 인프라를 구축하고 있었다. KAI는 이를 적극 활용하면 비용 부담을 줄일 수 있다고 판단해 나라온 개발에 착수했다.
작업장에는 고영윤 항공기 1팀 생산기술 차장이 날카로운 눈매로 나라온을 점검하고 있었다. 지상진동시험(GVT)을 마친 나라온 시제 2호기의 이상 유무를 살피는 작업이었다. GVT는 비행기를 공중에 매달아 놓고 특정 부위에 특정한 진동을 줘서 비행기가 설계 의도대로 작동되는지 확인하기 위한 것이다. 이 밖에도 다양한 시험이 이어진다. 시제기의 안전점검은 2013년 5월에 마무리되는데 15개월 정도 소요될 예정이다.
민간항공기 수출을 위해서는 항공기의 안전과 함께 상대국의 설계, 제작, 인증 기술을 상호 확인하고 인정하는 항공안전협정(BASA)을 체결해야 한다.
특히 항공 강국인 미국과 BASA를 체결하면 외국 수출도 용이하다. 이 때문에 정부는 항공기 완제품이 아닌 부품에 대해 2008년 2월 미국과 BASA를 맺었다. 정부는 나라온 개발을 계기로 소형 항공기급에 대한 BASA를 2013년 5월까지 체결할 계획이다.
정부는 나라온 개발로 인한 고용 창출 효과를 대략 연인원 1만600여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KAI는 나라온 개발로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게 됐다. 정부와 기업의 이해관계가 서로 맞아떨어져 정부가 580억원을 대고 KAI 등 민간에서 194억원을 투입하는 등 774억원을 들여 2008년 6월부터 나라온 개발이 시작됐다.
시제기 4대를 만드는 까닭
민항기 개발의 첫걸음은 설계가 아닌 시장 조사다. 어떤 비행기를 개발해야 수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지 따져본 뒤 거기에 맞춰 설계해야 하기 때문이다. 컨설팅 업체의 사전 조사 결과 4인승 항공기가 경쟁력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나라온의 경쟁 기종은 미국의 세스나와 시러스 SR22 등으로 쉬운 상대는 아니다.
한 대에 60만∼70만 달러 정도하는 이 급의 비행기는 주로 미국에서 출퇴근용으로 사용된다. 한국에는 교육용(항공대)과 산불감시용, 촬영용, 조종사 훈련용 등 모두 95대가 있다. 전 세계적으로 지난 10년간 7400대가 판매됐으며 이 중 4분의 3은 미국에서 소비됐다.
나라온의 경우 대략 1400개 정도의 큰 부품 단위로 이뤄졌는데 엔진을 제외하고 90%가량은 모두 국산화됐다. 엔진과 프로펠러 등을 국산화하지 않고 수입품을 사용한 것은 3년 안에 BASA 체결에 적합한 항공기를 개발하기 위해서다. 엔진은 차차 국산화를 추진할 계획이다.
고 팀장은 “비행기 엔진은 세계적으로도 GE와 롤스로이스, 프랫 앤 휘트니 등 3개사가 시장을 과점하고 있다”며 “장기적으로 국산 엔진을 사용하려면 우선 경제성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은 삼성테크윈이 소형 터보엔진을 생산하지만 세계적인 회사와 경쟁하기에는 가격 경쟁력이 떨어지는 것으로 알려졌다.
세부 설계까지 이뤄지면 시제기는 최소 4대가 만들어진다. 2대는 실제 비행에 투입되고 나머지 2대는 지상에서 각종 충격 등 구조 시험에 사용된다. 지난달 20일 첫 비행을 한 것은 시제 1호기다.
비행 가능한 시제기를 2대 제작한 것은 검사기간을 줄이기 위해서다. 예를 들어 1개의 비행기가 100개의 검사 항목을 거치는 데 1년 걸릴 경우 2대로 하면 6개월로 줄어든다. 선진국에서도 검사기간을 단축하기 위해 시제기를 4∼6대 만든다.
부족한 시간, 멸시
KAI는 인도네시아에 수출된 T-50과 국산 초음속 경공격기 FA-50 등을 생산하며 군용기 부문에서는 제법 지명도가 있는 회사다. 그러나 민항기 부문에서는 전혀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다. 그런 KAI가 민항기를 제작한다고 하자 주요 장비업체의 은근한 멸시가 계속됐다. 김임수 KAI고정익 체계담당 상무는 그때 상황을 이렇게 비유했다.
“현대자동차가 1986년 포니를 미국에 수출했을 때 당했다는 멸시와 조롱이 생각났다. 민간항공기 부문에서 평판도 없고 경력도 없는 우리가 장비를 조달하려고 하니까 부품업체들이 최신형 제품은 팔지 않겠다고 했다. 심지어 우리가 개발하는 모델에 맞춰 제품을 제공하지 않고 구형 제품을 사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라는 식으로 나왔다. 한참을 설득하고 군용기 제작 실적을 보여주고 나서야 제품을 살 수 있었다.”
개발 일정이 촉박해 시간과의 싸움을 벌여야 했다. 미 연방항공안전청(FAA)의 비행기 형식 승인을 받기 위해서는 신청 후 3년 안에 형식 인증을 받아야 한다. KAI는 2009년 12월 국토부에 이를 신청했고 FAA에도 비슷한 시기에 항공기 형식 승인 신청을 했다.
비행기 개발은 일반적으로 설계에서 제작까지 5년 이상 걸린다. 심지어 10년 가까이 걸린 경우도 수두룩하다. 군용기인 T-50은 개발 기간만 8년이 걸렸다. 나라온은 설계에서 제작까지 3년 만에 끝났다.
이러다 보니 부품의 디자인이 포함된 세부 설계가 끝나고 개발이 본격화된 지난해 8월부터 개발자들은 주말 휴식을 포기해야 했다. 평일에도 밤 12시까지 일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밤늦게까지 일하는 개발자에게 야식을 제공하기 위해 각 설계부서를 돌아다니며 음식 주문과 배달을 전담하는 연구원을 따로 둘 정도였다.
고생에 따른 보람인지 나라온의 성능은 동급 최강이라고 한다. KAI 측은 나라온이 경쟁 기종인 세스나와 시러스보다 우위에 있다고 자부한다. 나라온은 고도 1만2000피트까지 올라갈 수 있지만 세스나는 이에 훨씬 못 미친다. 김 상무는 “나라온의 성능을 자동차에 비유하자면 소형 승용차급이지만 성능은 제네시스에 해당된다. 반면 세스나는 그냥 1500㏄급 자동차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100인승 항공기 제작의 꿈
한국이 민항기 개발을 시도한 건 예전에도 있었다. 1991년에는 대한항공이 ‘창공91’이라는 항공기를 만들었고 2006년에는 ‘반디’호가 선보였지만 미국의 품질인증 규정을 만족시키지 못해 흐지부지 됐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FAA가 개발 및 설계 과정에 줄곧 참여해 BASA 체결이 손쉽게 이뤄져 수출 가능성이 매우 높은 상태다. 이 때문에 KAI는 나라온 개발을 계기로 장기적으로는 100인승 급의 항공기 시장에 KAI만의 브랜드를 가진 비행기를 제조할 생각이다.
다만 현실은 그렇게 녹록지 않다. 100인승 이상의 항공기 시장은 보잉과 에어버스가 양분하고 있다. 최근 중국상용항공기(COMAC)사가 자체 개발한 150∼200인승 규모의 C-919를 내놓으면서 시장질서 재편 분위기가 있지만 여전히 진입 장벽이 높다.
KAI는 우회 전략을 구상했다. 에어버스 등과 직접 경쟁하기보다 이들 대형 항공기 제조회사의 설계 과정에 1차 협력회사로 부분 참여하는 방식으로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하는 것이다. 실제로 KAI는 보잉 787이나 에어버스 380 등 대형 항공기의 설계 과정에서 부분 설계에 참여했다.
이와는 별도로 캐나다와 20∼100인승의 항공기 완전 설계를 공동으로 진행할 계획이다. 노하우를 축적한 뒤 숙원 사업인 100인승 민항기를 제조하는 것이다.
김 상무는 “엔진 국산화 등 가야 할 길이 멀지만 언젠가는 100인승 비행기를 우리 손으로 만들어 우리 브랜드로 세계 시장에 당당히 진출하는 게 꿈”이라고 강조했다.
사천=글 이제훈 기자, 사진=윤여홍 선임기자 parti98@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