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희조 (7) 산업화 비전 품고 전역 후 비료회사로
입력 2011-08-11 20:25
1960년 부패한 제1공화국의 이승만 정권은 4·19 학생혁명으로 물러났다. 이 혼란기를 수습하고 사회적 안정을 가져와야 할 정치계는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휴전 상황에서 북한과 대결하고 있는 군의 일부는 이러한 상황을 결코 바라만 볼 수 없다고 생각했다. 61년의 5·16 군사정변은 이렇게 해서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나는 새로운 삶의 전환기를 맞이했다.
정치를 비롯해 사회, 산업, 교육이 제대로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할 때 누군가는 기여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그래서 조국애와 청년의 꿈을 키웠던 군복을 벗고 전역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다가 충주비료주식회사의 기획이사직을 맡았다. 한국 산업계에 봉사하기로 한 것이다.
농업이 주업이었던 60년대 한국 사회에서 비료 생산은 매우 중요한 국가의 기간산업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비료공장 추가 건설을 위해 덴마크에서 사람을 불러와 적정성 검사를 실시했다. 그 전문가들은 “앞으로 10년 안에 나주와 충주 비료공장 외에 3개가 더 있어야 한다”고 보고했다. 나는 깜짝 놀랐다. 당시 나주와 충주비료공장에서 생산하는 비료도 남아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은 이들의 보고를 수용했다.
그것은 적중했다. 공장을 세우는 족족 비료가 모자랐다. 그러다 보니 일본 회사와의 합작 기회도 많이 생겼다. 미쓰이, 미쓰비시사가 주로 그 대상이었는데 우리 회사는 미쓰이를 상대했다. 합작 내용 중엔 에탄올을 이용한 소주공장 건설도 포함돼 있었다. 내가 일본어를 잘했기 때문에 일본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고 잘 상대해 주었다. 한국과 일본을 왔다 갔다 하면서 느낀 것은 당시만 해도 기술이나 문화적인 측면에서 우리나라가 50년은 뒤처졌다는 것이다.
이곳에서 일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많은 게 인간관계에 달려있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 건 바로 기업이라는 것이다. 상명하복의 군 사회에서는 지시와 복종밖에 몰랐다. 그러나 인간의 이해관계로 모인 기업에서는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대화와 협력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군이란 조직사회에서 경험한 것들이 큰 힘이 되었지만 경영 차원에서는 부족한 게 너무나 많았다. 그래서 늦은 나이지만 ‘배움에는 지각이 없다’는 신념으로 연세대 경영대학원을 힘겹게 마쳤다.
71년 충주비료 기획이사를 사임하고 한국에탄올과 한아통상을 실질적으로 경영했다. 일본의 앞선 산업기술과 경영정보는 과감히 도입했다. 그렇다고 무조건 수용한 것은 아니다. 우리의 상황과 맞지 않는 것은 거부하고, 일본식 모델 중 필요한 것은 우리 상황에 맞게 활용하면서 창의적으로 개발한 부분들은 거꾸로 일본에 전수하기도 했다. 나는 친일파는 아니다.
그 때의 경험을 토대로 2004년 한·일 관계사를 새롭게 조명하는 ‘회상과 기대’라는 책을 썼다.
최근 일본 극우 정당 관계자들이 울릉도를 방문하겠다는 문제로 또 다시 양국 관계가 틀어졌다. 이들의 울릉도 입성은 분명 막아야 한다. 그들은 일제 식민지 시대 점령했던 땅을 아직도 자기들 것인 양 착각하고 있다. 앞으로도 양국의 과거사나 진실 문제는 철저히 규명해야 한다. 하지만 반드시 미래 지향적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게 내 소신이다.
정리=김성원 기자 kernel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