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사 유해 찾는 박선주 발굴단장 ‘6년의 기록’

입력 2011-08-11 14:21


한 세기가 넘도록 시신을 찾았지만 여태 묻힌 곳조차 모른다. 남북이 합동으로 발굴조사단을 꾸린 적도 있었지만, 유해의 흔적도 발견하지 못한 채 101년이 흘렀다.

1910년 3월 26일의 미스터리

오전 10시 정각, 중국 뤼순(旅順)감옥 사형장. 유언이 있느냐는 질문에 사형대에 선 청년은 “‘동양평화 만세’를 세 번 외치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간수들은 청년의 마지막 요청을 거부했다. 10시 4분, 침묵 속에서 형이 집행됐고 15분엔 의사가 사망을 확인했다.

10시 20분, 흰 천이 덮힌 침관(寢棺)에 안치된 시신은 감옥 교회당으로 옮겨졌다(침관은 시신을 눕혀 안치하는 일반적 형태의 관으로, 감옥에서 특별히 제작했다. 당시 죄수 시체는 대부분 세로로 길쭉한 ‘통관’에 안치됐다). 청년의 동지인 우덕순과 조도선, 유동하가 망자를 위한 예배를 올렸다. 감옥을 빠져나간 관은 오후 1시 감옥 묘지에 매장됐다. 일본 통감부가 작성했고, 외무성이 소장한 안중근 의사 사형보고서 내용이다.

사형보고서는 ‘안의 태도는 매우 침착하여 안색과 말하는 모습에 이르기까지 일상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고 종용자약(從容自若)하게 깨끗이 그 죽음으로 나아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형수의 마지막을 세세히 적어놓았고 폄훼하지 않은 점으로 미뤄봤을 때 이 보고서는 기록에 딱히 거짓은 없어 보인다. 그러나 모든 사실을 기록하지 않았다.

누락된 부분은 시신이 예배당을 떠난 이후 오후 1시까지 관의 이동 경로다. 보고서는 예배부터 매장까지 2시간 40분간의 행적을 단 한 문장으로 다뤘을 뿐이다. 다른 부분을 꼼꼼히 기록한 것을 보면 몇 명의 인부가 동원돼 어느 위치에서 얼마만큼의 땅을 파고 묻었는지를 적어놓았을 법도 한데 그런 내용은 없다. 1905년 당시 지도엔 교도소 주변에 묘지가 몇 군데 있었는데 가까운 곳은 직선거리 300m에 있고, 먼 곳은 2㎞ 거리다. 기록의 빈틈은 안 의사 매장지를 추측하는 숱한 가설을 낳았다.

여러 가설 중 신뢰받은 것은 ‘이마이 후사코(今井房子)’ 설이다. 뤼순 감옥 간수 구리하라(栗原)의 딸 이마이는 8살이었던 1910년의 그날을 이렇게 기억했다. “중국인인지 일본인인지 알 수 없는 이들이 관을 메고 감옥 뒷문에서 나와 뒷산 묘지로 갔다”고. 8살 아이의 기억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는 없지만 그녀가 제시한 당시 사진 2장은 중요한 단서로 채택됐다.

2008년 4월의 미스터리

2004년 국가보훈처장이 중국 측에 안 의사 유해발굴 협조를 요청했다. 2006년 6월에는 남북한 공동으로 현장 조사도 했다. 이마이의 사진 2장과 당시 지도, 사형보고서 기록 등을 토대로 퍼즐 조각을 맞춘 결과 감옥 뒷산이 유력 장소로 지목됐고 2008년 3월 1차 발굴조사, 4월 2차 발굴조사가 이뤄졌다.

하지만 이 발굴은 아쉬움이 많았다. 2006년 10월 북한 핵실험으로 남북관계가 악화되면서 공동조사도 흐트러졌다. 발굴 직전 북한이 남측 단독 조사도 무방하다고 통보하면서 발을 뺐다. 반쪽 조사가 되고 말았다.

중국의 태도도 달라졌다. 매장 추정 지역에 아파트가 들어선 것이다. 교묘한 훼방으로 볼만한 일이었다. 당시 발굴을 진두지휘했던 박선주(64) 안중근 의사 유해발굴단장(충북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의 말에는 안타까움이 진하게 뱄다.

“2007년에 현장을 보겠다고 하니까 중국 측이 문화재 보호구역이라면서 안 된다고 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이 지역만 사유지라면서 아파트 터를 파는 공사가 시작됐다.” 아파트 공사 현장은 매장 유력지로 지목된 감옥 뒷산이다. 옛 감옥은 현재 박물관으로 바뀌었다.

우리 정부는 급히 아파트 공사 중지를 요청, 부랴부랴 발굴 작업에 착수했다. “굉장히 힘들었다. 발굴 작업을 하다 보면 더 팔 수도 있는 건데 중국 직원이 계획서보다 1㎝도 더 못 파게 했다.” 유해발굴단은 또 중국이 설정한 숙소∼형무소 발굴현장 동선에서 벗어날 수 없어 필요한 비품을 구입하지 못한 일도 벌어졌다.

“남북한과 중국이 모여서 서류를 작성했고 발굴 지역을 보전해준대서 믿었는데, 정작 아파트가 올라가버렸다. 중국이 의도적으로 발굴 작업을 방해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박 단장은 숱한 6·25 전사자, 희생자들의 유해를 찾아낸 이 분야 최고 전문가다. 하지만 이 발굴에선 2만5000㎡ 유해 매장 추정지역 중 4952㎡만 팠고 아무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단서를 찾아라

유력 장소에서 진행된 유해 발굴은 실패로 끝났다. 이대로 안 의사의 유해를 찾을 가능성은 영영 사라진 것일까? 전후 사정을 살펴보면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발굴단은 2008년 발굴 지역이 아닌 다른 곳에 매장됐을 가능성을 검토하는 계획을 세웠다. 과학적인 방법도 동원됐다. 새로 찾은 지도와 3D 스캔, 지리정보 시스템(GIS) 등을 이용해 감옥 주변 지역을 입체 영상으로 복원하고, 이를 통해 당시 관을 멘 사람들이 어떻게 매장지까지 이동했는지를 추정해 볼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일제가 의도적으로 매장 장소를 숨겼다는 것도 발굴 가능성을 포기할 수 없게 만든다. 사형 당일 안 의사의 두 동생 정근과 공근은 형 집행이 끝나기를 기다려 시신을 돌려 달라고 요청했지만 일제는 거절했다. 외려 통곡하는 두 사람을 끌어내고선 경찰력을 동원해 역까지 압송, 강제로 귀국시켜 버렸다. 이는 ‘시체와 유해의 교부에 대해 사망자의 친척 또는 친구가 요청할 경우 언제라도 교부할 수 있다’고 명시된 당시의 일본 감옥법 제74조에 어긋난다.

일제가 자국법을 어기면서까지 안 의사 시신을 유족들에게 인도하지 않은 것은 안 의사의 묘역이 항일운동의 성지가 될 가능성을 염려했기 때문일 것이다. 감옥 묘지에 묻었다가 시신의 위치가 노출될까 두려워 다른 곳으로 몰래 이장했을 가능성이 제기되는 이유다.

일제가 물러난 뒤 이장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뤼순감옥 일대는 1949년 이후 식량증산 차원에서 토지 개간이 이뤄졌다. 개간 중에 유해가 발견돼 이장됐을 수도 있다.

관련 기록이 뒤늦게 공개될 수도 있다. 안 의사가 옥중에서 집필했던 ‘동양평화론’은 1910년대 만주지역 신문에서 그 내용이 언급되긴 했지만, 정작 원본은 1979년이 돼서야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현재의 사료 검색 시스템은 한계가 뚜렷하다. 외교 채널을 통해 일본, 중국 등 관련국에 사료 수집 협조를 구하고, 유해발굴단 자료위원회 위원들이 1주일 정도 해외 출장을 가서 도서관을 돌며 자료를 찾는 것이 전부다. 전문가를 뽑아 담당해야 할 도서관을 지정한 뒤 1년이건 2년이건 자료를 뒤지는 시스템으로 바꿔야 한다. 자료위원들이 출장지로 삼았던 일본 국립도서관, 외무성 자료관 등은 누구라도 출입할 수 있고 방위성 도서관도 허가만 받으면 이용할 수 있다.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안중근연구소의 신운용 책임연구원은 “유해 발굴이 중요한 문제라면 전문적으로 자료 발굴을 전담할 한국인이 있어야 한다”면서 “일본 외무상에게 자료 찾아 달라고 요청해봐야 소용없다. (일본인 중에) 누가 성의를 갖고 찾아주고 싶겠느냐”고 반문했다. 박 단장은 “중국 기록은 외국인이 접근할 수 없도록 돼 있기 때문에 아쉽지만 현지 전문가들에게 연구비를 줘서 문건을 찾도록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우리는 최선을 다했는가

문제는 정치적 의지다. 2008년 발굴이 실패로 끝난 뒤 2009년, 2010년엔 관련 예산이 전혀 배정되지 않았다. 하지만 안 의사 순국 100주년이었던 지난해 3월 이명박 대통령이 유해발굴단 구성을 지시하면서 1억400만원이 급히 마련됐고, 올해는 3배 이상 늘어난 3억5100만원이 편성됐다. 하지만 동일본 대지진과 독도 문제 등으로 한·일 관계가 껄끄러워지면서 일본 현지 조사를 위한 비용을 지출하지 않은 탓에 올해 예산은 아직 많이 남았다.

유해 발굴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계획적으로 꾸준히 지원해야 성과가 나온다. 박 단장은 “이왕 찾겠다고 시작한 이상 특별법을 만들든지 해서 적정한 예산을 배정하고 성과를 내도록 지원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6·25 전사자 유해 발굴은 관련법이 제정되고 예산이 지원되면서 성과를 냈다고 상기시켰다.

어쩌면 안 의사 유해를 못 찾을지도 모른다. 이미 유실됐을 수도 있다. 그러나 포기하기에는 이르다. 그동안 발굴 작업이 너무나 부실했고 미진했기 때문이다. 유해를 찾을 때까지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것이 오늘날 광복절을 존재하게 해준 이들 중 한 분인 안 의사를 대하는 후대의 도리다.

청주=김도훈 기자 kinch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