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걸어온 길·책이 걸어갈 길을 비추다

입력 2011-08-11 21:20


책, 그 살아 있는 역사/마틴 라이언스/21세기북스

서구에서 성서는 특별한 마법과 치유의 능력을 지닌 책이었다. 17세기 영국과 뉴잉글랜드 사람들은 성서가 코피를 멎게 해주며, 출산 시 합병증으로부터 여성을 보호해준다고 믿었다. 후기 빅토리아 시대 잉글랜드 햄프셔에 살았던 한 여성은 발작을 치료하기 위해 신약성서를 한 장씩 찢어 샌드위치 중간에 넣는 식으로 한 권을 모두 먹었다고 한다.

성서는 신탁의 도구로 쓰이기도 했다. 해결해야 할 문제에 봉착했을 때 사람들은 임의로 성경을 펼쳐 나타난 구절에서 해결책을 찾곤 했다. 이는 오늘날 기독교 신자에게도 그대로 답습되고 있다. 물론 성서는 책 이상의 의미를 지닌 구원의 정전(正典·canon)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책은 인쇄된 종이를 제본한 형태, 즉 오늘날 우리가 가장 친숙하게 여기는 전통적인 코덱스(낱장을 묶어서 표지로 싼 형태) 방식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쐐기문자가 새겨진 수메르 점토판은 기원전 2000년경,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상징이었다. 여러 고대 사회가 그러하듯 메소포타미아에서도 문자해득능력은 소수 전문가들의 전유물이었다. 세제와 법률문제를 기록하기 위해 사용된 쐐기문자 점토판은 관료주의를 태동시킨 근간이었다.

기원전 6세기경 사용됐던 중국 최초의 책은 잉크로 글을 쓴 얇고 기다란 대나무 혹은 나무 조각을 두루마리처럼 말아 끈으로 묶은 형태였다. 그러다 서기 105년 환관 채륜이 종이를 발명했고 이 제지법이 스페인을 통해 유럽에 전파된 것은 한참 후인 12세기경이었다. 종이는 무려 2000년 동안 책의 역사를 이끌어온 물리적 주인공이었다.

오늘날 책의 역사는 코덱스 방식 이후에 나타난 가장 커다란 변화인 전자혁명에 직면하고 있다. 책의 전통적인 구성 물질인 종이를 완전히 제거함으로써 책의 물리적 형태를 바꿔놓은 전자혁명은 500여년 전 인쇄술의 발명을 둘러싸고 그랬던 것과 같은 반응과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과연 책의 위기가 닥친 것일까. 2000년대 중반, 중국과 미국은 12만종의 신간서적을 출간했으며 영국은 20만종 이상을 출간해 세계 1위의 출판 강국으로 자리매김했다. 저자인 영국 출신 역사학자 마틴 라이언스는 이런 수치를 제시하면서 “책의 종말이 목전에 임박했다는 주장은 현실을 너무 과장하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하지만 책은 살아남는 데 성공했으나 대신 고급문화의 산물이라는 확고한 지위를 포기하는 대가를 치르는 중이다. 게다가 오늘의 현실에서 독자들은 과거에 비해 책의 물리적 완전성에 대해 그다지 존경심을 갖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에도 책은 다양한 엔터테인먼트 매체 중 하나인 소비재로 진화 중이다. 책은 변하고 있다.

정철훈 선임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