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러워 그렸는데, 역사라네…” 미술치료 받는 위안부 할머니

입력 2011-08-11 20:42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아.



그런 생각이 없어.

너무 고생돼서.

뭐 재미난 세상을 살았으야지.

끌려가서도 풀려나서도 다 똑같아.



조금 다르지.

그거만 상대 안 했다 뿐이지 다 똑같아.

몰라 이제는, 잊어버려서.

소원?

젊음을 돌려줘야지, 내 젊음을

.

김화선 참 예쁘다···.”

(2011년 8월9일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에서 나눈 대화 중)

김화선 할머니는 올해 85세다. 당뇨와 관절염, 노환으로 보행기 없인 한 발도 못 내디딜 만큼 쇠약해졌다. 그래도 일본군 얘기가 나오면 새처럼 작은 김 할머니의 몸에 힘이 들어갔다. 그 힘은 분노고 저항이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김 할머니는 2008년부터 그림을 그렸다. 고통스럽게 지나온 길을 60여점의 화폭에 담았다. 할머니의 그림은 초등학생이 그린 것 같았다. 그림 속 할머니는 웃었고, 울었고, 절망했고, 체념했다. 화인 맞은 것처럼 지워지지 않는 아픈 기억, 평생 불면의 밤을 안겨준 치부조차 그림으로 끄집어냈다.

할머니 고향은 평양 모란봉. 다홍색 한복치마가 잘 어울렸고, 길게 땋은 새카만 머리카락이 유독 윤기 나고 빛나 예쁨 받던 셋째 딸이었다. 행복했던 유년시절은 사진으로도 남아 있지 않다. 이젠 기억조차 떠올릴 기력이 없다. 김 할머니의 인생을 추억하는 건 그림들뿐이다.

김선현(44) 차의과대학교 교수(차병원 임상미술치료)는 김 할머니를 비롯한 광주 나눔의 집 할머니들과 미술치료 수업을 2008년부터 매주 목요일 진행하고 있다. 그림은 의식과 무의식 모두를 끄집어내는 힘이 있다. 자신이 미처 몰랐던 세상까지도 끌어내는 그림. 김 할머니의 그림도 그랬다.

할머니, 그림으로 말하다

할머니는 매화나무를 그렸다. 2008년 11월 나눔의 집에 입소한 할머니가 첫 미술치료시간에 그린 것이었다. 앙상한 매화나무에 떨어질 듯 매달려 있는 꽃잎은 처연했고, 그 색은 유독 핏빛이었다. 할머니가 그간 감당해야 했던 고통, 할머니가 안고 산 상처를 보여주는 듯했다.

지나온 삶을 떠올리는 할머니의 붓질은 때로는 격정적으로, 때로는 가느다랗게 떨렸다. 위안소에서 군인들에게 당하던 때의 기억을 그릴 때는 거칠게 마구 휘갈겼고 어린 시절 자신의 모습과 고향 대동강가를 그릴 때는 힘 있게, 분명한 선으로 스케치했다.



일본군인의 모습은 하나같이 험상궂었다. 찢어진 눈, 두꺼운 입술. 그리고 할머니의 모습보다 두세 배 크게 그려졌다. 할머니는 다시 태어난다면 일본 군인이 돼, 일본인을 죽이고 싶다며, 일본 군인의 모습을 도화지 가득 그리기도 했다.

하지만 할머니는 유독 단 한 명의 일본 군인에 대해선 관대했다. 그림 속에서 ‘고지마상’이라는 일본 군인은 어린 ‘위안부’ 소녀에게 건빵을 건네고 있다. 저고리와 치마를 갖춰 입은 소녀는 위안소 침상에 앉아있고, 고지마상은 군화를 벗지 않은 채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고지마상은 할머니를 좋아했던 군인으로, 매일 찾아왔다. 찾아와도 대화만 나누고 가거나 할머니에게 먹을거리만 주고 돌아가는 날이 많았다. 그는 사람이 죽는 전쟁이 싫다고 했고, 고향에 가 농사짓고 살고 싶다는 말을 자주 했다. 할머니도 그런 그가 싫지 않았지만, 그 역시 일본군인일 뿐이었다.

할머니의 그림에서 가장 많이 나타난 색상은 일본 군복의 색, 황토색이다. 지긋지긋한 군복색은 그림 속에서도 지겹도록 할머니를 따라다녔다. 두려웠던 순간, 슬펐던 순간의 기억이 떠오를 땐 할머니는 더더욱 황토색을 짙게 칠했다.

검정, 회색도 많았다. 어둡고 불안한 감정을 드러내는 색이다.

할머니가 가장 좋아하는 색은 어린 시절을 담은 그림에 나타나는 분홍, 빨강이다. 고무신과 치마에 곱게 입힌 색들이다. 결혼식 장면을 상상하며 그린 순백의 웨딩드레스에도 할머니는 가슴 한가운데 빨간 꽃을 그려 넣었다. 못다 핀 꽃, 할머니의 청춘이다. 일본군에 끌려가던 날, 맛있는 걸 준다는 말에 속아 따라갔던 그날에도 할머니는 꽃분홍 저고리를 입었다. 일본군인은 할머니 손에 분홍색 사탕 두 개를 건넸다. 감언에 깜빡 속아 넘어갔던, 할머니 인생에서 가장 억울하고 분통한 순간의 기억이다.

초록, 파랑은 주로 유년시절 고향의 기억을 떠올린 그림에 많다. 노랑은 자신을 돋보이게 할 때, 저고리라든가 배경 색으로 사용했다.

할머니의 모습은 시절마다 달랐다. ‘위안부’로 끌려가기 전엔 곱게 땋은 머리카락을 허리까지 길게 내린, 예쁜 한복을 입은 소녀였다. 위안소에선 머리를 풀어 헤치고 속옷만 입은 모습으로 그려졌다. 해방 후엔 바지차림에 머리를 짧게 깎은 남장 여자로 분했다. 아마도 할머니는 ‘위안부’가 된 순간부터 여자이길 스스로 포기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눔의 집에 들어오고서야 비로소 안정을 되찾아가는 할머니. 한복을 입고 앉아 있는 그림 속 할머니는 편안해 보인다.

2009년 7월말의 그림 한 장. 해방되던 날의 기억이다. 할머니와 다른 ‘위안부’ 다섯 명은 산 속 공터에 서 있고, 일본군인 두 명이 자신의 키만큼이나 긴 총칼을 들고 걸어가는 장면이다. 태극기는 없었다. 할머니는 그림을 그리면서 심장이 뛴다며 중도에 멈추기도 했다. 그날 일본군은 감금된 ‘위안부’들을 강제로 끌고 가 총살하거나 땅에 묻었다고 했다. 일본 압제로부터 해방되던 날 할머니는 가장 두렵고 무서운 시간을 보냈다.

체념은 붓 끝에도 녹아있다. 나눔의 집을 찾아간 지난 9일에도 할머니는 붓을 들어 꽃잎을 그렸다. 정성도 감정도 담지 않고, 붉은 색을 반복해서 여기 저기 흩뿌리기만 했다. 다 지난 일. 희망이 있다면 봄을 다시 보는 것이지만, 어차피 아깝고 찬란한, 다시 못 올 세월이다.

김 할머니는

할머니는 초콜릿, 우유, 그리고 돈을 준다는 말에 속아 열일곱 살이던 1942년 일본군에 끌려갔다. 싱가포르, 만주, 중국 등으로 옮겨가며 일본군인을 상대했고, 질병과 살해 위협으로 수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다. 그때 차라리 죽었어야 했다는 할머니에겐 살아있는 것 자체가 고통이었다.

할머니는 해방 후에도 여비가 없어 단신으로 중국 각지를 전전하다 1947년 군함을 얻어 타고 가까스로 귀국했다. 하지만 고향인 평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한국전쟁 통에 가족까지 잃어버렸다. 할머니는 고국에 돌아와서도 남자에 짓밟혔다.

2000년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 한국위원회 증언팀에 제출된 기록에 따르면, 할머니는 오랜 기간 성매매 여성으로 여기 저기 팔려 다녔다. 산골로 도망가 풀 뜯어 먹고 살기까지 했지만, 다시 붙잡혀 인천 사창가로 끌려갔다. “고생을 엄청나게 하고, 수천 명을, 아니 수억 명(의 남자들)을 상대했을 거야. 내가 세도 못해 숫자는.” 고향이 조치원인 한 할아버지의 도움으로 하이타이 세제 장사를 시작하면서 비로소 자신의 삶을 살기 시작했다는 할머니. 장사란 장사는 다 해봤고, 식당일, 파출부 안 해 본 일이 없었다. 할머니는 혼자 살았다. 같이 살자는 사람이 나타나기도 했지만, 할머니는 자신이 임신할 수 없는 몸이라고, 더 이상 여성으로 살아갈 수 없다며 뿌리쳤다.

외롭고 가난했지만, 그 와중에도 고학생, 고아를 보면 지나치지 못했던 할머니. 공납금도 대신 내주고, 용돈도 쥐어줘 대학까지 보낸 아이들만 7명이다.

하지만 정작 할머니는 어느 누구에게도 보호 받지 못했다. 대전에서 600만원짜리 전세방에 살던 할머니는 셋방이 든 건물이 경매에 넘어갔는데, 혼자만 경매대금 변제대상에서 제외돼 길거리로 내몰리는 등 온갖 고초를 겪었다. 할머니가 나눔의 집에 들어온 건 2008년 11월. 이곳이 할머니의 마지막 거처가 될 것이다.

살아남은 할머니들

나눔의 집엔 현재 8명의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살고 있다. 1992년 민간 모금으로 설립된 이래 다녀갔거나 머무는 ‘위안부’ 할머니가 총 30명. 그중 고인이 된 할머니가 강덕경, 김순덕, 김옥주, 문명금, 문필기, 박두리, 지돌이 할머니 등 15명이다.

일본이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을 치르는 동안 우리나라에서 강제 동원한 ‘위안부’는 2만 여명으로 추산된다. 위안소에서 숨을 거뒀거나, 고국에 돌아오지 못했거나, 신분을 감추고 살았거나 2011년 현재까지 신고된 위안부 피해자수는 234명이다. 이중 생존한 할머니는 70명뿐. 모두 80·90대 고령인데다 병환으로 생의 마지막 순간만 기다리는 상황이다.

“일본 정부의 사과와 피해보상이 이뤄지지 않고 있는데 할머니들이 다 돌아가시면 어쩌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 일본과의 관계는 변한 게 없어요. 한스러운 일이죠.” 윤정모(65) 작가의 한탄이다. 윤 작가는 ‘에미 이름은 조센삐였다’, ‘봉선화가 필 무렵’ 등 위안부 소설을 펴냈다.

안신권(50) 나눔의 집 소장도 가슴을 쳤다. 안 소장은 할머니들이 돌아가시면 다른 일제시대 피해자 유족들에 처소를 내줄 생각까지 하는 중이다. 할머니들의 건강상태는 날이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

미국·네덜란드·캐나다·유럽연합 의회 등에서 일본의 사과와 법적 배상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지만 일본 정부는 묵묵부답이다. 일본의 민주당은 야당 시절인 2000년 과거사 문제 해결을 위해 ‘전시 성적 강제피해자 해결촉진법안’을 제출했다. 하지만 이 법안은 11년째 상정되지 않은 채 잠자고 있다.

그림, 살아있는 마지막 역사

나눔의 집에선 1993년 2월부터 당시 홍익대 미대생이던 이경신 자원봉사자의 도움을 받아 그림 수업이 매주 3년간 진행됐었다. 순수 취미 활동의 하나였다. 그럼에도 할머니들은 놀라운 변화를 경험했다.

‘우리는 그림을 그리며 너무나 행복했다.’

고 강덕경, 김순덕 할머니는 화가의 경지까지 올라 ‘빼앗긴 순정’, ‘못다 핀 꽃’과 같은 작품을 남겼다. 전시회도 열렸다. 할머니들은 위안을 얻고자 그림을 그리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자신들이 겪은 일이 세상에 올바로 남겨지길 원했다.



‘나는 내 그림이 누구의 손에 팔려나가는 걸 원하지 않았다. 내가 돈을 벌기 위해 그림을 그린 게 아니라 그림을 통해 우리의 일이 세상에 알려지고. 역사에 올바로 남겨지고. 다시는 이 땅에 그런 슬픈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렸으니까.’(이규희의 ‘두 할머니의 비밀’ 중 고 김순덕 할머니의 회고)

마른 꽃잎이 바스러지듯 한순간에 스러질지 모를 할머니들. 이젠 기억도 희미해져 증언조차 힘든 할머니들이 할 수 있는 건 누워서라도 붓을 들고 무언가를 그리는 일 뿐일지도 모르겠다.

오늘도 김 할머니는 그림을 그린다. 떨리는 손으로, 붓으로 크레파스로 연필로….

광주=이경선 기자 boky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