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음악 이야기] 흑인 영가와 미국 찬송가
입력 2011-08-10 20:29
미국의 종교음악은 미국 음악 역사의 효시이기도 하다. 미국 음악의 제1기는 1620년에서 1800년까지로 대부분 유럽 음악에 근거한다. 유럽 여러 지역의 음악이 유입되자 미국의 종교음악은 그 근본이 흔들리게 된다. 미국 청교도들은 자신들을 ‘순례자’라고 지칭했다.
영국을 떠나 미국으로 이주를 택했던 청교도들은 1612년 암스테르담에서 발간된 ‘Ainsworth Psalter’란 책을 가져왔다. 이 책은 순례자들이 네덜란드에 사는 동안 네덜란드인에게서 배운 노래를 포함하고 있다. 음악적 수준이 어느 나라 사람보다 높았다.
찬양의 노래란 뜻을 가진 ‘알라바도스’라는 재미있는 민속음악이 신대륙에서 일어나기도 했으며 영국 선장인 프란시스 드레이크 경은 영국 시편가를 신대륙에 가져와 보급했다. 그리고 1628년에 설립된 매사추세츠 해협의 식민지는 1621년에 출판된 라벤스 크로프트 노래집을 사용하기도 했다.
18세기에는 훌륭한 시편가가 증가했으며 이것들은 교회에 귀중한 찬송가로 발전한다. 17세기 전반 위대한 설교자 조너선 에드워드를 중심으로 한 대각성운동, 조지 화이트필드의 복음주의운동도 교회음악이 발전하는 계기가 됐다. 1762년에 예배를 위한 최초의 찬송가가 필라델피아에서 출판된 것은 이를 배경으로 한다.
이렇게 되자 교회에서 노래 부르는 것을 체계화하기 위해 가창학교가 설립되기 시작했다. 보스턴 같은 큰 도시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곳에서도 학교가 세워졌다.
초기의 가창학교는 정기적인 그룹 모임으로 합창과 음악 기초를 가르쳤는데 계명창법이 교육의 기초로 쓰였다. 가창학교 영향으로 오라토리오를 연주할 수 있는 단체가 많이 생겼으며 공립학교에서 음악 교육을 시작하게 됨으로써 교회의 가창학교는 미국 음악교육의 실질적인 시작을 의미한다.
미국 음악의 제2기는 1800년에서 1860년 사이 독일인을 비롯한 유럽 이민자의 급증에서 한 단계 더 발전한다. 미국 찬송가의 독자적인 특성에 영향을 주었던 것은 오히려 흑인들의 민요와 노동요, 즉 그들의 영가(靈歌·spirituals song)였다. 흑인들의 음악 속에는 아프리카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노예 생활의 고달픔, 노예라는 정신적·육체적 속박의 한이 서려 있었다. 그들의 울분은 하나님을 영접하면서 더욱 절실하고도 절박한 마음을 담은 음악으로 표출되면서 흑인 영가라는 음악 장르를 만들게 되었다.
흑인 음악의 출발점은 17세기 말 미국 남부 노예농장에서 흑인 노예들이 부른 노동요로 거슬러올라간다. 노동력과 생산성 향상을 위한 그들의 노동요는 백인 주인들에 의해서도 권장되었다. 협동을 요하는 작업에서 주로 독창 선창자와 합창 군 사이의 교창 방식에 따라 불려졌다. 노동의 고통을 덜어준 것은 바로 저 눈물나게 고마운 노동요였던 것이다.
이 시절에는 노동요와 조금 다른 ‘필드할러(들판의 고함소리)’가 있었다. 이것은 반쯤은 고함을 치듯, 반쯤은 요들송을 부르듯 고음 가성으로 소리를 낸다. 외침, 부름 ,독백, 감탄 같은 음성적 요소로 이루어졌다. 이런 소리들은 각종 메시지를 전달할 뿐만 아니라 멀리 떨어진 동료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 때로는 단순한 자기표현의 한 형식, 정서의 음성화일 때도 있었다.
노동요와 필드할러 둘 다 칼칼한 목구멍 소리(Guttural voice)를 내고 음정이 미끄러져 올라가거나 내려오는 성음(Sliding tonalities)을 냈다. 부름과 응답(Call-and-response) 패턴을 쓰고 있다는 것은 그 음악들이 모두 아프리카에서 직접 유래된 것임을 보여준다. 수 세기에 걸친 흑인들의 쓰라린 체험이 남북전쟁 후에 구체화되어 할러(holler)는 후에 블루스 창법에 강한 흔적을 남기게 된다.
김기원 (관동대 음악학부 교수 (사)기원오페라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