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대 작가들의 이야기 ‘이문구의 문인기행’ 출간… 특유의 사실적 묘사로 문인들의 삶 그리다

입력 2011-08-10 17:53


당대 문인들과 누구보다 폭넓게 교류한 ‘관촌수필’의 작가 이문구(1941∼2003). 그가 문단의 동료 선후배에 대해 풀어놓은 이야기가 ‘이문구의 문인기행’(도서출판 에르디아)이라는 제목을 달고 나왔다. 그가 재현해 놓은 문인들의 에피소드는 상식을 뛰어넘는 기행에 가깝다. 그 에피소드나 기행이 우리에게 유의미한 것은 그것이 우리 삶의 저편의 일들이며 우리 마음속에서 한번쯤은 저질러 보고 싶은 일을 그들이 대신해 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선생은 또 작가들의 문학적 개성만을 존중한 것이 아니라 기질과 취향도 존중하셨다. 그래서 선생에게는 문객과 식객이 들끓었다. 문객들 속에는 유명화가나 서예가도 많았지만 갈데없는 술꾼, 화투꾼, 경마꾼도 숱했으니 선생의 취미가 서민풍을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10쪽 ‘한국 현대문학의 거목’ 중)

소설가 김동리(1913∼1995)의 서민 취향을 구체적으로 묘사한 대목이다. 이문구는 서라벌 예술대학 스승이던 동리를 1961년부터 95년까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찾아가 설날 세배를 올렸다. 그런 만큼 동리의 웬만한 사생활을 훤히 꿰뚫고 있을 진대 이문구는 정작 시치미를 떼며 이렇게 눙치고 있다.

“선생과 나는 처음부터 오사바사하게 지낸 사이가 아니었다. 따라서 선생을 기리는 이 자리에서도 이렇다 하게 늘어놓을 만한 이야기가 없는 것은 당연하다.” 입담의 대가인 이문구가 이야기를 하기 전, 입술에 침을 바르는 예비 동작인 것이다.

“선생은 엄격할 데서 엄격하고 단호할 데서 단호하여 문득 서슬이 퍼렇지만 보통 때에는 부드럽기가 봄바람 같아서 아무에게나 호호야(好好爺)로 통한다. 미아리 너머 길음시장의 기름집 아줌마는 젊은 아저씨라고 불렀지만 국어책에서 ‘가난한 사랑의 노래’에 감동한 소녀들은 늙은 오빠 정도로 짐작할는지도 모른다. 어떠랴. 호호야로 통하는 것도 옳고, 젊은 아저씨로 부르는 것도 옳고, 늙은 오빠쯤으로 어림하는 것도 옳을 것이다.”(39쪽 ‘가난한 사랑 노래’)

한국 문단의 작은 거인 신경림 시인에 대한 단평이지만 이보다 더 신경림의 특징을 잘 포착해낸 문장은 없을 것이다.

“가짜 고은이 팔도에 성명을 떨치며 득세할수록 진짜 고은은 죽을 지경이 되어갔다. 정말 고역의 고은이었다. 그가 가짜 고은 하나를 잡은 것은 청진동 시대의 초기였다. 신고를 받고 경찰의 힘을 빌렸다. 체포 현장은 단성사 옆의 백궁다방이었다. 이튿날 가짜 고은에 대한 진짜 고은의 증언 요구가 있어서 경찰서에 가보니 웬 여자 하나가 훌쩍거리고 있었다. 진짜 고은은 노총각인데 가짜 고은은 처자가 있었다.”(77쪽 ‘5세 신동의 50년’)

시인 고은을 사칭해 인생을 즐긴 가짜 고은의 비화에 이르면 총각 시절부터 이미 수많은 분신을 거느릴 수밖에 없었던 고은의 마성과 자장을 짐작케 한다.

이밖에도 한승원 염재만 박용래 송기숙 조태일 임강빈 강순식 황석영 박상륭 김주영 조선작 등 모두 21명의 문인들 체취를 느낄 수 있다. 출판사 편집주간 이흔복 시인은 “이문구의 입담은 일상의 현실에서보다 동료 문인들의 인물평을 하는 대목에서 빛을 발한다”며 “문인에 대해 잘 알고 또 그 이야기를 재미있게 쓸 작가는 이문구 외에 없다고 판단했다”고 출간 배경을 설명했다.

정철훈 선임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