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 시각장애인 앵커 되다… 이상녀·이창훈 母子의 도전
입력 2011-08-10 17:57
지난달 19일, KBS 보도국 천장에 달린 10여개 조명등이 환하게 켜졌다. 카메라 2대가 얼굴의 정면과 측면을 모니터 4개에 비췄다. 뉴스 앵커 최종 면접시험이 시작됐다. 그는 태어나서 한번도 TV를 본 적이 없다. 더욱이 뉴스를 전하는 아나운서의 모습이 어떤지 알 수 없다. 그는 점자 단말기를 통해 뉴스를 정확하고 빠르게 읽었다. 연습할 때 말이 빨라지고 실수도 많았는데 실전에 들어가니 오히려 긴장되지 않았다. 한 글자 한 글자 읽는데 마치 누군가 뒤에서 등을 받쳐주는 듯 든든했다.
그는 ‘다니엘의 세 친구’가 뜨거운 풀무불에 던져질 때 ‘하나님께서 건져주지 아니하실지라도 믿음을 버리지 않겠다’고 말한 신앙고백을 떠올렸다. 당락은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하나님이 함께하셨음을 확인하고 싶었다. 마침내 523대 1이란 경쟁을 뚫고 한국방송 사상 최초의 지상파 장애인 앵커로 합격했다.
이창훈(26·서울 은평침례교회)씨가 출석하는 교회는 시각장애인 교회가 아니다. 그는 교회에서 청년부 회장과 교회학교 교사로 봉사한다. 또 찬양을 인도하며 피아노 반주를 한다. 정안인들보다 몇 배의 봉사를 하는 그를 보면 그가 1급 시각장애인이란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그렇게 되기까지 그의 뒤엔 어둠속을 함께 걸어온 어머니 이상녀(57·경남 진주은혜교회) 집사가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이름, 엄마
1986년 6월, 이 집사에겐 생애 가장 어려운 시기였다. 생후 7개월 된 아들의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아들의 눈동자가 팽이처럼 돌았다. 팔 다리도 뻣뻣해져갔다. 뇌수막염이었다. 의사는 뇌수막염 후유증으로 시신경이 완전히 손상돼 더 이상 볼 수 없다고 했다. 형체는 물론 빛과 어둠조차 구분할 수 없다니, 청천벽력 같은 진단이었다.
“딸 셋을 낳은 뒤 가진 아들이라 더 애지중지 키웠는데 이건 아니야! 아니야….” 잠자던 아들이 고개를 조금 움직였다. ‘혹시 아이의 시력이 돌아오지 않았을까’란 생각에 캄캄한 방에 누운 아이의 눈꺼풀을 들어 올리고 손전등을 비춰보는 이상한 행동을 반복했다. 실성한 사람처럼.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다. 당시 예수님을 몰랐기에 집에서 굿도 하고 절에 가서 불공도 드렸다.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산에서 제사를 드리기 위해 유명하다는 한 도사를 만났다. 뜻밖의 말을 했다. 도사는 “이번에도 차도가 없으면 교회에 나가세요”라고 했다.
예수님이 누구인지 기도는 어떻게 하는지 몰랐지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경남 진주은혜교회에 나갔다. 아들의 시력 회복을 위해선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그때부터 시작된 눈물의 새벽예배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고 그 힘으로 살아간다.
“처음엔 아이의 시력을 회복시켜 달라고 울며불며 기도했지만 점점 저의 육신의 눈은 닫히고 영의 눈이 뜨이기 시작했어요. ‘너와 네 자녀를 위해 울라’는 말씀을 붙들고 아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했고, 믿지 않는 다른 수많은 영혼을 위해 부르짖으며 기도하게 됐어요.”
이 집사는 자신이 두렵고 고통스러운 것은 아이로 인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문제 때문임을 깨달았다. 아이는 하나님께 맡기고 이웃을 위해 기도했다. 아들에게 용기와 도전의식을 불어넣어 주었다.
“아들아, 넌 하나님의 사랑스러운 자녀란다. 사람들은 볼 수 없기 때문에 도전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 때문에 도전하지 못하는 것이란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두려움이야. 용기를 가진 사람에게 꿈은 가까이 있단다.”
하나님께선 이미 아이의 밝은 미래를 준비하고 계셨다. 두 사람은 빛을 향해 한 발씩 내딛기 시작했다. 볼 수는 없지만 들을 수는 있기에 음악은 아들에게 세상과 소통하는 하나의 방편이었다. 여러 가지 악기를 가르쳤다. 피아노, 트럼펫, 트럼본, 베이스기타, 오카리나를 연주할 때만큼은 아들이 장애인이 아닌 것 같았다.
아들은 4∼5세 때부터 목사님의 설교 테이프를 듣고 따라 말했다. 목사님의 목소리와 억양을 그대로 모사했다. 스포츠 중계방송을 좋아하던 아들은 캐스터의 흥분된 목소리와 고조된 멋있는 멘트를 흉내냈다. 친구들과 밖에서 뛰놀지 못했던 아들은 주로 집에서 피아노를 치거나 설교 테이프를 들으며 자기 목소리를 녹음해 들었다.
아들은 8세에 서울 한빛맹학교에 입학했다. 이곳에서 초·중·고등학교 과정을 마쳤다. 기숙사 생활을 하는 아들을 만나기 위해 한 달에 두 번 정도 경남 진주에서 서울로 올라갔다. 아이를 만나고 돌아오는 발걸음은 무거웠지만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지켜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했다.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 모든 것을 엄마가 따라다니며 해주었던 아들은 점점 홀로 서 갔다. 학습능력도, 성취도도 크게 높아졌다. 학급회장을 도맡아 하며 리더십도 키워갔다. 점점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고 꿈을 찾았다.
나중에 전해들은 이야기다. 아들은 초등학교 시절 어느 날 갑자기 학교에서 사라졌다. 발칵 뒤집혔다. 다행히 그날 밤 아무도 없는 교회 예배당에서 혼자 설교하고 있는 아이를 찾았다. 아이는 전날 들은 목사님의 설교를 그대로 강단에서 해보고 싶었다고 했다. 그렇게 말씀을 사모하던 아들이 이제 스물다섯 살의 청년이 됐다. 그는 어떤 마음으로 인생을 살아왔을까.
하나님을 만나기, 세상과 소통하기
정안인들과 함께 공부하는 대학에서는 캠퍼스 생활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자신을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었다. 이씨는 자신을 알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동아리에도 가입하고 많은 인간관계를 통해 자신을 알렸다. 친구들에게 노트 필기를 부탁하고, 전자단말기를 활용해 공부했다. 남들보다 몇 배의 노력이 필요했지만 즐거웠다.
“고등학교 시절 꿈이 뭐냐고 물어보면 목회자라고 고민하지 않고 말했어요. 엄마의 꿈이기도 했지요. 그런데 대학 진학을 앞두고 ‘내가 과연 목회자가 될 수 있을까’란 고민을 했어요. 목사가 되기 전에 사회복지학을 먼저 공부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서울신학대학교와 숭실대학교 대학원에서 사회복지를 전공하게 됐어요.”
그는 시각장애 때문에 불행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다만 사춘기 때 자신이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구분 짓는 사회에 살고 있으며, 사람들이 자신을 다르게 대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신앙 안에서 고민했다.
“하나님을 만나려면 한 발짝 앞으로 나서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움직이고 도전할 때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고 만나주십니다. 그런 과정들을 통해 하나님의 섭리를 느꼈습니다.”
2006년, 대학교 3학년 때였다. 헌법재판소의 ‘안마업 독점’ 위헌판결 앞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시각장애인들의 비극을 접했다.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당시 전국시각장애인 청년연합회 부회장이었던 그는 뭔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다. 시각장애 청소년들의 절망을 담은 창작 뮤지컬 ‘극야(極夜)에 피는 해바라기’의 주연을 맡았다.
“마음의 눈을 통해 시각장애인들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시각장애인에 대한 사회의 무관심과 편견이 조금이라도 해소되기 바랐어요. 사회적 관심을 얻었던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일이었어요.”
그는 하나님이 주신 재능을 다 활용하고 싶었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재능의 한계는 어디까지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느끼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였다. 2007년 시각장애인 인터넷 방송에서 방송을 시작했다. 장애인 이슈 중심의 인터뷰와 토크쇼, 스포츠 중계 등을 하며 방송의 묘미에 푹 빠져 있었다.
또 한 번의 기회가 찾아왔다. 지난 6월, KBS 장애인 뉴스 앵커 선발 공모를 보고 하나님께서 또 하나의 길을 열어 주시지 않을까란 기대감에 가슴이 설레었다. 평소 세상과 소통하고 싶었던 그는 기도하면서 준비했고 원하던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내가 앞을 볼 수 없었기에 부모님께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어요. 또 내가 볼 수 없었기에 홀로 서울에 와서 공부하며 독립심을 키울 수 있었어요. 만일 제가 정안인이었다면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평범한 사나이가 됐겠죠. 세상적인 사랑을 갈구하는 마초적인 삶을 살았을 것 같아요.”
보이지 않는 지금이 감사하다고 말하는 그의 뒤엔 어머니 외에도 든든한 지원군이 많다. 아버지 이동율(64)씨는 늘 “넌 할 수 있다”며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3명의 누나 명은(35·주부) 지은(34·이화여대 연구교수) 기은(31·조경설계사)씨는 동생의 깔끔한 외모를 위해 패션 코디와 피부관리까지 코치해 준다. 그가 어느 곳에서도 움츠러들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가족들의 풍성한 사랑 때문이 아닐까. 그는 8월부터 3개월간 훈련을 받은 뒤 KBS 뉴스 앵커로 본격 활약하게 된다.
글 이지현 기자·사진 최종학 기자 jeeh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