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태원준] 광복절 경축사

입력 2011-08-10 17:38


5대 국경일 중 이명박 대통령이 ‘경축사’를 하는 건 광복절뿐이다. 제헌절 경축사는 국회의장이 하고, 개천절은 노태우 정부 이후 국무총리 몫으로 굳어졌다.

한글날은 2006년 국경일로 격상되면서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경축사를 했지만, 현 정부 들어선 총리가 하고 있다. 대통령의 3·1절 연설은 경축사가 아닌 ‘기념사’다.

이 대통령 취임 이후 세 차례 광복절 경축사 제목은 ‘광복의 빛, 더 큰 대한민국’(2008) ‘위대한 국민, 새로운 꿈’(2009) ‘함께 가는 국민, 더 큰 대한민국’(2010)이었다. 두 번이나 제목이 된 ‘더 큰 대한민국’은 정권의 기치로 내건 선진화를 경축사용 언어로 풀어낸 것이다. ‘MB 경축사’에 단골로 들어가는 일종의 후렴구라고 한다.

청와대 관계자는 이 대통령 경축사를 “큰 그림을 제시하는 화두형 연설”이라고 표현했다. 그래서 하나의 흐름으로 죽 읽히는 연설문을 선호하고, 굵직한 어젠다를 꺼낼 때마다 광복절 기념식을 무대로 삼았다. 2008년 ‘저탄소 녹색성장’을 국가비전으로 꺼내들었고, 2009년 ‘친서민 중도실용’, 2010년 ‘공정한 사회’를 얘기했다. 이렇게 키워드가 제시되면 정부 부처들은 일제히 후속조치에 착수한다. 경축사에 녹색성장이 등장하자 이듬해 107조원을 투자하는 녹색성장 국가전략이 발표되는 식이다.

따라서 이 대통령의 국정운영 흐름을 보려면 2008∼2010년 경축사를 차례로 읽으면 된다. 취임 첫 해에는 ‘선진’이란 단어가 15번이나 등장했다. “선진일류국가가 되려면 기본부터 돌아봐야 한다”며 안전, 신뢰, 법치를 강조하고, “선진화 문턱을 뛰어넘는 창의적 발상”으로 녹색성장을 제시했다. 온통 선진국 되자는 얘기였다.

2009년엔 톤이 조금 달라졌다. “세계 속 대한민국은 강하지만, 우리 안을 들여다보면 결코 낙관만 할 수 없습니다.” 분열과 갈등을 언급하면서 성장과 복지가 상생하는 ‘중도실용’을 주창했다. 2008년엔 없던 ‘사회적 약자’란 표현도 등장해 “시장경제의 효율성을 중시하면서도 서로가 서로를 보살피는 따뜻한 자유주의를 추구한다”고 했다.

2010년 경축사는 좀 더 직설적이다. ‘탐욕에 빠진 자본주의’란 말로 기존 경제 질서를 비판했고, “시장경제에 필요한 윤리의 힘을 더욱 키워야 한다”며 “승자가 독식하지 않는, 큰 기업과 작은 기업이 상생하는, 서민과 약자가 불이익을 당하지 않는 공정한 사회”를 역설했다.

2008년과 2009·2010년 경축사가 이처럼 달라지게 만든 건 2008년 9월 리먼브러더스 파산으로 시작된 미국발 금융위기였다. 세계경제를 주도하던 신자유주의 체제에 구멍이 뚫리면서 장기간 곪아온 사회 양극화 문제가 터져 나왔다. 그렇다고 시장경제를 포기할 순 없어서 차가운 시장에 온정을 불어넣으려는 ‘따뜻한 자유주의’, 부의 불평등을 윤리로 보완하려는 ‘공정한 사회’ 담론이 나온 것이다. 나흘 뒤 발표될 올 경축사도 이와 같은 흐름이라고 한다.

7·4·7(매년 7% 성장, 국민소득 4만 달러, 세계 7대 경제강국)을 공약하고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외쳤던 ‘경제대통령’이 이제 상생과 분배를 말하고 있다. 대통령 스스로 변했다기보다 ‘바다 건너 온’ 외부 요인에 의해 그렇게 됐고, 그 요인은 아직도 정리되지 않아서 경제위기를 몰고 올 태세다. 다음에 대통령 하겠다는 사람들이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 이쯤 되면 명확해진다.

아무튼 이 대통령의 세 차례 경축사에 점수를 매긴다면, ‘공정한 사회’에 가장 후하게 주고 싶다. ‘녹색성장’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공식강령이 됐고 ‘친서민 중도실용’은 대통령 지지율 제고에 큰 몫을 했지만, ‘공정한 사회’는 역풍을 맞았다. 불공정한 정부 관행이 잇따라 드러나며 “그런 주제에 무슨 공정이냐”는 욕을 먹었다. 그래서 이 어젠다가 마음에 든다. 사람들은 그렇게 욕하면서 공정함에 대해 값진 체험학습을 했다.

태원준 정치부 차장 wjt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