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희조 (6) 인민군에 쫓기며 몇 번의 죽을 고비

입력 2011-08-10 18:04


창동에서 후퇴해 서울 중심가로 가니 황당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한강 다리는 전부 끊겼고, 육군본부는 인민군이 점령한 상태였다. 배를 타러 서빙고로 갔지만 총을 든 몇 사람들이 이미 차지하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넋을 놓은 채 그저 구경만 하고 있었다.

당시 한남동 일대는 온통 배와 참외밭이었다. 아직 채 익지 않은 배와 참외를 따먹으며, 민간인 집에서 밥도 얻어먹으면서 요기를 했다. 함께한 중대원은 3∼4명이 전부였다. 나머지는 사복으로 갈아입고 피난행렬 속으로 도망쳤기 때문이다. 뱃사공은 군복을 입은 채 계속 배만 응시하는 우리가 불쌍했던지 나중엔 그냥 태워주었다. 뱃사공의 따뜻한 배려로 겨우 한강 다리를 건넜다.

미군들도 밭에서 참외와 오이를 훔쳐 먹으며 피난행렬에 동참하고 있었다. 한강, 금강 일대에서는 아군을 적군으로 오인한 비행기 폭격이 수시로 있었다. 과천을 거쳐 수원으로 갔더니 미군이 집결해 있었다. 그런데 다시 군인들을 차에 태워 안양으로 올려보냈다. 남하하는 인민군을 막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탱크가 밀려내려 오는데 도저히 역부족이었다. 할 수 없이 보리밭에 숨었다가 인민군 탱크를 뒤쫓아 조금씩 내려왔다.

청주에서 회인으로 넘어가는 곳에 피발령이란 재가 있었다. 1개 소대가 점심을 먹고 있는데 갑자기 ‘쌕쌕이’(제트기)가 폭격을 퍼부었다. ‘이렇게 죽는구나’ 생각하며 가슴을 졸였다. 폭격은 나를 피해갔다. 남은 소대원들을 이끌고 황간을 거쳐 대구로 향했다. 체력도 전의(戰意)도 바닥났지만 오직 신앙 하나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실 인민군에 포위됐을 때는 몇 번이나 내 목에 총을 갖다 댔다. 하지만 고향에 두고 온 가족 때문에 차마 방아쇠를 당길 수 없었다. 살고 싶어 사는 것도 아니고, 죽고 싶어서 죽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몇 번의 고비를 통해 생명의 주권은 오직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알았다.

대구에 주둔하고 있을 때 공병학교 창설 지시가 떨어졌다. 난 공병학교 행정처장으로 발령이 났다. 김해로 내려갔는데 당시 김해군수의 협조로 농업학교 자리에 공병학교를 설립했다. 얼마 후엔 공병학교 특별부대인 철교중대 중대장으로 발령이 났다. 강을 건너기 위해 단시간 내 다리를 놓는 특수임무를 맡은 부대였다.

당시 미군은 장기적인 한국군 발전계획을 수립하고 있었다. 미군을 한국군으로 대체하는 게 비용이나 전략 면에서 훨씬 효율적이라고 본 것이다. 그 일환으로 한국군 장교 중 우수한 자를 선발해 미국 본토의 공병학교에서 교육을 시켰다. 그렇게 해서 1952년 미국 버지니아 주 포트 벨보아의 육군공병학교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워싱턴DC까지 17일이 걸려 도착했다. 한국은 전쟁으로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벌이고 있었지만 미국은 너무나 아름답고 평화롭기만 했다. 당시 양유찬 주미 대사, 국무총리를 역임했던 강영훈 준장이 무관으로 나와서 우리 일행을 영접했다. 난 무엇보다 ‘젊은 시절 못다 이룬 꿈을 하나님께서 이런 식으로 이뤄주시는구나’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열심히 공부했다. 한국 사람이 거의 없다시피 한 그곳에서 꿈같은 6개월은 너무도 빨리 지나갔다.

유학 후엔 진해의 육군대학으로 발령이 났다. 당시 육군대학은 해군사관학교 내에 있었다. 나는 교관으로 고급 장교들을 교육하는 일을 맡았다. 거기서 마음껏 책을 보고 공부했던 기억은 지금도 큰 자부심으로 남아 있다.

정리=김성원 기자 kernel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