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문화거리, 역사가 숨쉰다… 육상도시 대구, 골목이 일품이네∼
입력 2011-08-10 21:40
‘2011 대구세계육상선수권대회’가 보름 앞으로 다가왔다. 뜨거운 열기 속에서 세계 육상선수들이 기량을 선보일 대구는 선비문화를 꽃피운 유서 깊은 고장으로 수많은 문화유적과 다양한 문화체험이 가능한 도시이다. 특히 대구는 ‘골목의 도시’로 근대문화거리를 비롯해 음식골목 등 수많은 특화골목들이 존재한다. 다양한 볼거리와 먹을거리가 풍성한 그때 그 시절의 골목으로 시간여행을 떠나본다.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언덕 위에 백합 필 적에/ 나는 흰나리 꽃 향내 맡으며/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청라언덕과 같은 내 맘에/ 백합 같은 내동무야/ 네가 내게서 피어날 적에/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작곡가 박태준(1901∼1986)의 학창 시절 추억을 담은 가곡 ‘동무생각(思友)’의 노래비는 대구 근대문화거리 중심지인 동산동 청라언덕에서 옛 추억을 반추하고 있다. 푸른 담쟁이덩굴이라는 뜻을 지닌 청라(靑蘿)는 언덕 위의 선교사 주택과 이웃한 신명고교(전 신명여학교) 담장에 푸른 담쟁이덩굴이 무성해 붙여진 이름.
대구의 100년 전 역사가 고스란히 녹아 있는 근대문화거리는 계산오거리의 엘디스리젠트호텔에서 청라언덕과 90계단을 거쳐 계산성당, 이상화 고택, 서상돈 고택, 제일교회, 약전골목, 염매시장을 거쳐 진골목에 이르는 약 1.5㎞. 비록 고층아파트와 아스팔트 도로가 곳곳에서 골목길에 생채기를 냈지만 그곳에는 옛 정취와 애환이 조각처럼 선명하게 각인돼 있다.
동산병원 뒤편에 위치한 청라언덕에는 블레어 주택, 챔니스 주택, 스윗즈 주택으로 불리는 서양식 건물 3채가 수령 100년의 아까시나무를 배경으로 이색적인 풍경을 그린다. 고색창연한 이 주택들은 100년 전 미국 선교사들이 거주하던 곳이다. 붉은 벽돌이 인상적인 블레어 주택은 지금도 푸른 담쟁이덩굴에 둘러싸여 있다. 의료선교원으로 이용되는 스윗즈 주택의 기초석은 대구읍성 축조 때 사용됐던 조선 영조시대의 성돌.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들은 1896년 약전골목에 제일교회를 마련해 복음전파에 나서는 한편 제중원(동산병원 전신)과 신명여학교를 세워 대구의 근대의료와 근대교육에 크게 공헌한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선교사와 그 가족들이 잠든 청라언덕의 은혜정원 묘비에는 ‘나는 그들을 사랑하고 있다’ 등 가슴 뭉클한 문구가 새겨져 있다.
계성학교(현 계성고교)에 다니던 박태준은 합창단에서 백합처럼 피부가 하얀 신명여학교 학생 유인경을 만나 청라언덕에서 사랑을 키웠다. 훗날 노산 이은상에게 첫사랑에 대한 추억을 털어놓던 박태준은 갑자기 악상이 떠올라 밤새 곡을 만들었다. 곡을 들은 이은상이 영감을 받은 듯 그 자리에서 시를 쓰기 시작했다. 국민애창곡 ‘동무생각’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청라언덕에는 사과가 주렁주렁 열린 사과나무 한 그루가 있다. 초대병원장 존슨 박사가 1899년 미국 미주리 주에서 가져온 사과나무와 신맛이 강한 토종 능금나무를 접붙이면서 대구는 사과의 고장으로 뿌리를 내리게 된다. 현재의 사과나무는 당시 사과나무의 후계목.
지금은 찾아보기 힘든 나무전봇대 가로등을 지나 계산성당 쪽으로 방향을 바꾸면 90개의 계단으로 이뤄진 골목길이 나온다. 옛 신명여학교 담장과 이웃한 90계단은 3·1운동이 일어났던 진원지로 계단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대구에서 유일하게 하늘과 맞닿은 지평선이 보인다.
골목길은 아스팔트 대로를 건너 계산성당으로 진입한다. 1902년 적색과 흑색 벽돌로 건축한 계산성당은 영남 최초의 고딕양식 성당으로 김수환 추기경과 교황 요한 바오르 2세는 물론 안중근 의사의 체취가 묻어 있는 유서 깊은 곳. ‘박정희양과 육영수군의 결혼 주례사’ 일화도 이곳 계산성당에서 탄생했다. 계산성당 마당에는 오래된 감나무 한 그루가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이인성 나무’로 명명된 이 감나무는 일제강점기 시절의 화가 이인성이 계산성당을 배경으로 그려 유명해졌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시로 잘 알려진 이상화 시인의 고택은 검은색 외투에 검은색 중절모를 쓰고 뒷짐을 진 시인의 벽화가 그려진 골목길 안쪽에 위치하고 있다. 1939년부터 임종할 때까지 4년 동안 거주했던 고택은 아담한 한옥으로 마당에는 석류나무 한 그루와 우물이 당시 모습 그대로 보존돼 있다.
이상화 시인 고택 맞은편의 한옥은 국채보상운동으로 유명한 서상돈 선생의 고택. 서상돈 선생은 1907년 국권회복운동 차원에서 일본에서 빌린 국채를 국민 모금으로 갚자는 운동을 주도한 인물. ‘남자는 금연을 하고 여자는 은비녀를 뽑아 국채를 갚자’는 서상돈 선생의 외침은 90년 후 외환위기 때 금 모으기 운동으로 승화한다.
서상돈 고택을 돌아 나가면 계산성당의 검은색 쌍둥이 종탑과 청라언덕에 위치한 제일교회의 하얀색 쌍둥이 종탑이 나란히 보이는 성밖골목. 골목은 분명 한국의 골목인데 담장 너머로 보이는 풍경은 유럽의 도시를 닮아 외국인들도 깜짝 놀란다고 한다.
미로를 방불케 하는 근대문화거리는 약전골목으로 연결된다. 200여개 한약방과 한의원이 도로를 따라 600m나 이어지는 약전골목은 대구를 대표하는 골목. 한약 달이는 냄새에 숨만 쉬어도 몸이 가뿐해지는 기분이다. 동의보감 등 한약서와 약작두 등 한방기구가 전시된 약령시한의약문화관 옆에는 창문을 제외하고는 온통 담쟁이덩굴에 둘러싸인 벽돌색 교회가 고색창연한 모습을 자랑한다. 서양 선교사들이 세운 고딕양식의 제일교회로 대구의 모든 근대역사가 이 교회에서 일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청라언덕의 제일교회는 새로 지은 건물.
약전골목 뒤편에 황토색 포장을 한 작은 골목은 염매시장까지 이어진다. 이 골목은 부산과 한양을 연결하던 영남대로로, 조선시대에는 과거길에 나선 선비와 장사꾼들이 몰려 북적대던 국토의 대동맥이었다. 손수레 한 대 지나갈 정도로 좁은 영남대로에는 지게를 진 농민과 갓을 쓴 선비들의 벽화가 옛 정취를 더한다.
약전골목 일대는 소설가 김원일의 자전적 소설 ‘마당 깊은 집’의 무대로도 유명하다. ‘마당 깊은 집’은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 마당이 넓은 솟을대문 집에 세들어 살던 사람들의 애환을 그린 소설로 골목 곳곳에는 정소아과 등 소설에 등장하는 집들이 몇 채 남아 있다.
비록 생채기는 났지만 세월의 흐름을 거부하는 옛 골목길에서 만나는 그윽한 문향은 옛것을 지키려는 대구사람들의 우직함 때문이 아닐까.
대구=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