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아침] 그리스도의 향기
입력 2011-08-10 19:19
나에게 딱 6개월의 삶이 남아있다면? 그것도 서른 넷 아직 한창 나이에? 연애 한 번 못 해봤고 고액연봉에 승승장구 폼 나는 인생도 아니었다면?
드라마 ‘여인의 향기’ 주인공 ‘연재’의 현재 상황이다. 연봉 1400만원 여행사 수배담당 직원, 오랫동안 계약직으로 있다 얼마 전 정식사원이 된 경우라 빛 안 나고 잔심부름은 모두 연재 몫이다. 집에서도 마찬가지다. 고등학교 때 간암으로 아버지를 잃은 뒤 철없는 엄마 덕분에 애늙은이가 다 되었건만, 엄마는 ‘나쁜 기집애’를 입에 달고 언제 호강시켜줄 거냐며 여전히 투정이다. 안 먹고 안 입고 안 쓰며 모아둔 적금이 세 개나 되는데, ‘뽀글이’라 불리든 말든 파마를 하면 오래 가라고 꽉꽉 말며 산 인생이다. 그런데 억울하다! 담낭암 말기임을 알게 되었을 때 연재가 느꼈던 첫 감정이다.
하여 남은 인생, 후회 없이 살아보겠노라고 첫 적금을 깼다. 예쁘게 화장하고 일등석 타고 일본 여행을 갔다 왔다. 난생 처음이었다. 죽기 전에 해보고 싶은 것들도 적었다. 사랑했던 사람들을 매일 웃게 해주고, 그동안 괴롭혔던 사람들에게 소심한 복수를 날려 주리라. 무엇보다 예쁜 사랑을 하다 연인 품에서 죽으리라. 뭐 드라마이고 보니 연재의 소망들은 예쁘게, 감동스럽게 이뤄질 게 뻔하다. 인생이 드라마대로 안 되는 현실의 우리들이 그런 시한부일 때 더 참담한 일이다.
하지만 알고 보면 우리는 모두 ‘시한부’이다. 남은 삶이 6개월, 6년, 60년인지 그것을 알고 사느냐 모르고 사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종말론적으로 산다’는 것은 세대주의자들이 말하는 우주적 시나리오를 믿는다는 것과 다르다. 하루를 마지막처럼, 지금 이 순간을 종말처럼 진지하게 대면하는 삶! 삶의 방점이 ‘나중에’에 있는 사람은 지금 안 먹고 안 쓰고 참고 버티며 적금통장을 세 개나 모았던 삶이 억울하고 분할 일이다. 하지만 삶의 방점이 ‘지금, 여기’에 있는 사람은 내일이 내게 주어지지 않더라도 아쉽지 않을 일이다. 지금 나와 함께한 사람들에게 최선을 다하며 늘 ‘하루씩’ 살아왔을 것이니까.
남기는 것을 ‘향기’라 표현한 것일까? 연재, 그 여인의 향기가 무엇을 남길지 아직은 모른다. 적어도 두 사람은 그 향기를 기억하며 바뀔 것 같다. 정확하고 빈틈없되 죽어가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이 없던 의사 ‘은석’은 ‘마지막을 함께하는 친구 같은 주치의’로! 삶의 기쁨 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수많은 날들을 그냥 ‘대충’ 살아가던 재벌2세 ‘지욱’은 하루의 삶을 기적으로, 선물로 여기며 치열하게! 한 여인의 향기가 그리 힘이 있을진대, 그리스도인이 남기고 가는 향기는 더 강력해야 하지 않을까?
나를 알았던 사람들, 내가 했던 일들, 내가 만났던 세상에 그 향기가 오래 남아 삶의 기적이, 생의 기쁨이 생겨나도록 말이다. 내가 죽어도 이 세상에 여전히 가득할 향기, ‘그리스도의 향기’를 믿는 이라면 ‘시한부’의 삶이 뭐 그리 괴롭고 두려운 일이랴. 내게 남은 시간을 아직 알지 못하는 이의 용감한 선언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만약 그 시간을 알게 된다면 우리가 드려야 하는 기도는 ‘기적을 통해 내 생명을 연장시켜 달라’는 절규보다는 ‘남아있는 날들 동안에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게 해 달라’는 소망이어야 하지 않을까.
백소영 교수 (이화여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