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조미자] “그 조금 사는 세상”
입력 2011-08-09 17:41
한때 같이 근무하던 후배가 유명을 달리했다. 그는 집으로 가는 방향이 같아 퇴근길이면 합승을 했다. 겨울이 뒷걸음치면 학교 뒷산에서 캔 쑥을 한 움큼 주며 봄엔 쑥국이 그만이라고 했다. 염전이 있는 곳에서 근무했기에 조수가 밀려나가면 뻘밭에 나가 모시조개를 캐주기도 했다. 조개를 넣어 한소끔 시원하게 끓인 쑥국을 먹을 때마다 그의 훈훈한 인정을 떠 마시곤 했다.
그는 이제 40대 후반이다. 살 만큼 살았다고 할 수도 없다. 어려운 고비를 넘기고 한창 커 가는 자식을 바라보며 대견하고 흐뭇해할 시기에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상가(喪家)로 가는 차 안에서 “소주를 몇 병이나 마셔도 끄떡없었는데, 장사라고 했는데…” 누군가가 독백처럼 중얼거렸다. 그러나 누구 하나 대꾸하는 이가 없었다.
영정 사진의 그는 웃고 있었다. 나를 보고 손을 흔들며 구두 뒤축에 손가락을 넣으며 뛰어나올 것 같은 환상이 들었다. 나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의 부음을 전해주자 기사 아저씨는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오직 “그 조금 사는 세상, 그 조금 사는 세상”만 되풀이하였다. 정말 살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있을까 싶었다. 허탈해져 왔다. 만남은 헤어짐을 전제로 하고, 헤어짐은 또 다른 만남을 목적으로 한다지만 그 화려한 글귀에 속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들은 만남보다 예정된 허다한 이별을 눈앞에 두고 사는 것만 같았다.
이 세상 생겨난 것들은 자라고 변화하며 언젠가는 스러지고 만다. 오늘 살아있을지라도 내일을 기약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다. 고뇌하고 아파하며 저마다 닥친 시련에 주름 하나 더 만들며 번민하는 게 살아있는 증표일지 모른다. 평범하게 지나는 하루가 천국의 하루와 같다는 어느 사람의 글이 떠오른다.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듯 거리의 상점에는 언제나처럼 불이 들어왔다. 우연이었을까? 차내의 라디오에서는 대중가요가 흘러나왔다.
‘…산다는 건 좋은 거지/수지맞는 장사잖소/알몸으로 태어나서/옷 한 벌을 건졌잖소…’
저절로 노래가 입술에 묻어나왔다. 자동차는 인덕원 사거리를 지났다. 묘지 근처의 산굽이로 올랐다. 평상시에는 그냥 스쳐 지났던 산 중턱의 묘표들이 오늘따라 유정해 보였다. 어제까지 웃으며 안부를 물어오던 그가 내일은 저 차가운 땅속에 눈을 감고 있을 거라니. 묘비에 졸(卒)을 새길 때 생(生)을 돌아보는 것이 인생이라니.
비석 옆에는 패랭이꽃이 색팽이처럼 피어나고 있다. 순간 생명의 외경을 느껴본다. 존재하기에 꽃의 흔들림을 볼 수 있는 기쁨. 눈으로, 코로, 귀로 전해오는 모든 감각이 아름답고 귀하게 여겨진다. 저녁노을에 자줏빛으로 타오르는 꽃송이들은 이 세상 못다 한 아쉬움을 일일이 불러내는 것 같았다. 한편으론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세상의 만물과 공존하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이냐고 속삭이는 것 같다.
문득 차를 세우고 싶어졌다.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과 어깨를 부대끼며 그들 속에 함께 섞이고 싶어졌다.
조미자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