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희조 (5) 6·25 전쟁터에서 신앙은 점점 깊어가
입력 2011-08-09 17:52
조국의 광복과 함께 나는 고향에 돌아왔다. 새로운 조국 건설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무슨 일이라도 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신탁통치 정국 속에서 조국은 몸살을 앓고 있었다. 김구 선생이 돌아오고 여운형이 본격적으로 활동했다. 이데올로기 싸움도 치열해졌다. 조국이 어떤 방향으로 갈 건지는 누구도 알 수 없는 그야말로 안개 정국이었다.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고민했지만 뚜렷한 목표가 서지 않았다. 당시 한국 정치는 유학파나 외국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이 주도권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직장에 들어갔다.
미군정 하에서 잠시 충청남도 재산관리처 감정관으로 일했다. 패전으로 한국에 남겨놓고 간 일본인들의 재산을 관리하는 일이었다. 식민지 하에서 고난당한 민족의 재산이었기에 철저히 감정하고 공정하게 분배되는 데 신중을 기했다. 그러나 마음 한켠으로는 ‘솟구쳐 오르는 조국애와 뜨거운 열정을 쏟아부을 수 있는 다른 일은 없을까’ 골몰했다. 그때 내 나이는 아직 20대 중반, 피 끓는 청춘이었던 것이다.
마침 내 친구가 “육사가 괜찮다는데 같이 가보자”고 했다. 난 그 말을 무시했다. 당시 육사(육군사관학교)는 직업 없는 사람들이나 가는 곳쯤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친구의 설명을 들으면서 귀가 솔깃해졌다. 그 친구는 “중학교만 나와도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갈 수 있고, 너도 소위가 될 수 있다”며 거듭 입학을 종용했다.
결국 친구의 권유대로 재산관리처 감정관 직업을 그만두고 1947년 육사 시험에 응시했다. 비록 남한만의 단독 정부라 할지라도 수립된 정부의 국군으로서 긍지와 자부심을 갖고 1949년 3월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육사 8기. 김종필씨가 동기였다. 첫 발령지는 대전의 제2 보병사단 사령부였다. 정부는 수립되었지만 남한은 여순사건, 제주4·3사건으로 극도의 혼미상태였다. 그토록 한민족이 소원했던 광복이었지만 조국의 현실은 남북의 분단과 이념 갈등으로 나뉘는 미완의 광복이 되고 말았다.
내가 맡은 임무는 제2사단 16연대 3중대장으로서 태백산 구마동 일대와 경북 영주, 봉화 근방의 소천, 춘향 지역을 담당해 북한으로부터 내려오는 빨치산을 봉쇄하는 일이었다. 당시 북한은 10대 남녀들까지 방한복을 입혀 남하시키고 있었다. 끊임없이 침투하는 공비들을 도저히 해결할 수 없어 곤욕을 치른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끊임없는 국지전은 결국 남북한 간 전면전으로 확대되고 말았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마자 전군에 비상이 걸렸다. 나는 중대를 이끌고 곧바로 의정부로 출동했다. 창동 쯤에 도착했을 때 이미 포탄이 떨어지고 있었다. 이틀 정도 버티다 결국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1950년의 6·25전쟁은 나에게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신앙이란 무엇이고, 민족이란 무엇인지 깊이 고민하게 했다. 잘 사는 자와 못 사는 자의 구별 없는 공산주의 사회를 이루겠다는 그들의 꿈은 그들이 떠받드는 수많은 인민들의 희생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그들을 막기 위해 동족에게 인정사정없이 총을 겨누어야 하는 나의 번민도 깊어갔다. 나는 죽음의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기면서 인간의 추악한 생존본능과 이기성을 똑똑히 보았다. 그리고 하나님 없는 인간의 모든 가능성은 허구임을 절실히 느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맞닥뜨리는 생사의 갈림길에서 점점 신앙에 눈떠갔다.
정리=김성원 기자 kernel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