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희조 (4) 가세 기울자 유학 꿈 접고 직업학교로

입력 2011-08-08 18:12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집안도 주저앉고 내 꿈도 좌절되고 말았다. 10대 시절, 나는 국내가 아닌 해외에서 공부해보고 싶었다. 처음에는 막연한 동경 같은 것이었지만 나중에는 점점 더 구체화되어 갔다. 외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오면 조국을 위해 뭔가 기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버지의 죽음은 그 모든 꿈을 접어버리게 했다. 대신 나는 직업학교를 선택했다. 내가 다닌 대전공립직업학교(한밭대 전신)는 충남 연산에서 기차로만 1시간 20분 거리였다. 유학의 꿈은 접고 가정형편도 어려우니 일단 취업이라도 해보자는 심산이었다. 그래도 학교 다닐 때는 급장을 하면서 공부를 잘해 학교 대표로 뽑혀 부상으로 일본 여행을 하게 됐다. 부산항에서 시모노세키를 거쳐 도쿄를 돌아오는 코스였다. 나에겐 좌절된 유학을 맛보는,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여행이었다.

학교 졸업 후엔 조선광업진흥주식회사에 입사했다. 학교에서 한 사람을 뽑는데 유일하게 내가 뽑힌 것이다. 회사는 전쟁에 필요한 특수강을 생산하는 곳이었다. 일제강점기였기에 당연히 일본 회사였다.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때였다. 기존 금광은 모두 올스톱시키고 특수강 채굴에 주력하고 있었다.

거기서 1년 반 있다가 만주로 전근을 갔다. 당시 만주엔 만주광업개발진흥주식회사가 있었다. 당시 만주는 일본 군대가 만주국을 만들어 점령하고 있었다. 조선의 많은 젊은이가 만주로 쏟아져 들어왔다. 이유는 나처럼 취업이 목적이기도 했지만 한국의 독립을 위해서 온 사람도 적지 않았다. 나는 회사 일에 쫓겨 독립투사들을 만나지 못했다. 대신 내가 하는 일이 곧 조국의 앞날에 도움이 될 거란 확신은 있었다.

난 일본이 지배하는 만주 땅에서, 일본인이 북적거리는 일본 회사에 다니고 있었지만 절대 일본인에게 굽신거리지 않으려 했다. 조선의 이미지를 나쁘게 하는 일도 의도적으로 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아내와 나는 당시 일본인이 밀집한 동네에 살고 있었다. 조선인으로서 행동거지가 늘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아내는 마치 일본에 굽히지 않겠다는 뜻인 듯 늘 한복을 입고 지냈다. 아내는 이른 아침만 되면 방안에서 조용히 기도를 올렸다. 그 모습을 볼 때마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마루에서 기도하던 게 떠올랐다. 그 기도 속엔 조선의 독립에 대한 간절한 염원도 들어 있었다. 당시 만주 상공엔 미군의 폭격기인 B-29가 자주 출몰했다. 비행기 소리만 나도 일본 사람들은 방공호로 뛰어들었다. 나와 아내 또한 적잖은 두려움이 있었지만 태연하게 집에서 일을 봤다. 그들은 그런 우리를 늘 존경하는 눈으로 바라봤다.

일본의 패망과 함께 내가 다니던 회사도 망하고 말았다. 회사에 다니던 사람들은 오합지졸 어디론가 흩어져 버렸다. 배편으로 아내를 먼저 한국에 보내고, 나는 남한과는 비교적 단거리인 해주, 즉 예성강 쪽 길을 택했다. 당시만 해도 이미 러시아군이 곳곳에 배치돼 있었다. 일본의 전세가 기울자 러시아가 선전포고를 하면서 대동아전쟁에 참여한 것이다. 그 같은 러시아의 참여는 포츠담회담으로 가시화되었다. 러시아 군인들은 조선 사람들의 시계를 모조리 뺏어갔다. 내가 차고 있던 시계도 빼앗겼음은 물론이다. 당시는 이미 38선이 쳐져 있어서 남한으로 넘어오는 데 여간 애를 먹은 게 아니다.

정리=김성원 기자 kernel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