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기독교 성지 순례] 부활한 한국 최초 교회… 선조들 굳센 믿음 잇다

입력 2011-08-07 17:52


(23) 총신대학교 내 소래교회

우리나라 모든 교회의 어머니, 이 땅에 세워진 최초의 교회 ‘소래교회’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황해도의 16칸 기와집 소래교회는 그 자리에서 자취를 감췄다. 하지만 한국 교계는 소래교회를 포기할 수 없었다. 1988년 복원을 통해 경기도 용인시 양지면 총신대 양지캠퍼스에서 다시 태어났다. 캠퍼스 내 작은 언덕을 지나 나무 계단을 오르면 나타나는 숲에 둘러싸인 기와집이 바로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소래교회다. 19세기에 만들어져 20세기에 복원됐고 21세기에도 여전히 기독교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한국 기독교의 요람=1895년 7월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에 한국 개신교 최초의 교회인 송천교회(松川敎會), 곧 소래교회가 세워졌다. 쓰러져가던 초가집에서 예배를 드리던 소래공동체는 건축헌금 17만냥을 들여 8칸짜리 기와집을 짓고 소래교회라고 이름 붙였다. 1884년 이 지역에 복음이 전파된 이후 처음으로 번듯한 교회 건물을 갖고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지역에 복음이 전파된 것은 최초의 권서(勸書) 서상륜(1848∼1926)에 의해서다. 서상륜이 만주에서 한글로 번역한 성경을 들여와 동생 서경조(1852∼1938)와 친척들, 마을 주민들을 전도했다. 처음에는 10명 남짓한 사람들이 예배당 없이 서경조의 집에 모여 예배를 드렸다. 교인이 차츰 늘면서 추운 겨울에 마당에서 예배를 드려야 할 정도로 공동체 규모가 커졌다. 청일전쟁이 한창이었지만 교회를 짓기로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소래교회는 오직 우리 조상들의 헌금으로 지어졌다. 서경조를 비롯한 소래공동체 교인들은 외국인 선교사들의 도움을 정중히 거절했다. 스스로의 힘만으로 교회를 짓기 위해서였다. 헌금과 건축자재, 무료 봉사까지 소래교회 건축에 든 경비는 17만냥 이상 들었다고 한다.

소래교회에서 첫 예배는 1895년 6월 9일 드려졌다. 완공된 것은 한 달 뒤인 7월 8일이지만 교인들은 그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내부가 완공되지 않은 건물에서 신축예배를 드렸다. 교회 내부에는 당시 풍습대로 남녀가 한자리에서 예배드리지 않도록 남녀 좌석을 구분하는 가림막을 드리웠다고 한다. 교회가 세워진 자리는 수백년 동안 마을 주민들이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서낭당 터였다. 우상숭배를 하던 곳에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당이 세워진 것이다.

교인 수가 늘면서 이듬해에 8칸을 더 늘렸다. 총신대 양지캠퍼스에 복원된 소래교회는 16칸짜리로 증축된 교회 모습이다. 총신대에 소래교회가 복원된 것은 서양 선교사를 의지하지 않고 우리 스스로 세운 자생 교회를 잊지 않기 위해서다. 현재 황해도 소래교회 터에는 교회의 흔적초자 남아 있지 않다.

소래교회 복원은 1984년 예장 합동 측 황해노회의 결의로 시작됐다. 87년 설계도를 완성하고 88년 3월 28일 총신대 양지캠퍼스에서 기공 예배를 드렸다. 그해 9월 30일 황해도의 소래교회가 총신대 양지캠퍼스에 다시 그 모습을 드러냈다.

복원된 소래교회는 현재 신학대학원생들의 기도처로 쓰이고 있다. 마루에는 강대상이 하나 있고 작은 방에는 아무것도 꾸며져 있지 않은 소박한 모습이다. 마루와 방 한쪽에는 방석이 쌓여 있다. 척박했던 시기 소래교회 교인들의 믿음을 되새기며 기도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지금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한국 최초의 교회를 세운 서상륜·경조 형제의 신앙=소래교회는 성경을 우리말로 번역한 최초의 권서인 서상륜과 소래교회 목사가 된 서경조 형제가 중심이 돼 세워졌다. 권서는 성서공회에 소속돼 성서를 보급하는 한편 성서를 읽도록 돕는 사람을 말한다.

평북 의주 출신인 서상륜은 중국어에 능통해 만주를 오가며 인삼을 팔았다. 그는 1878년 만주를 방문했다가 장티푸스를 심하게 앓았다. 30세의 젊은 나이에 죽을 위기까지 겪은 그를 치료한 사람이 스코틀랜드 출신의 의료선교사 헌터였다. 서상륜은 헌터의 동료인 매킨타이어와 로스 목사의 전도로 로스 목사에게 세례까지 받았다. 그는 만주에 더 머물며 로스 목사를 도와 한문성경을 한글로 옮겼다.

서상륜은 1882년 자신이 번역한 최초의 성경인 ‘예수셩교 누가복음젼셔’를 갖고 들어오다가 국경에서 붙잡혔다. 하지만 탈옥에 성공해 외가인 황해도 송천리로 피신했고 동생 서경조를 비롯한 친척과 주변 사람들을 전도했다. 그는 생을 마칠 때까지 평신도로 살았다. 신앙을 갖기 전 아내를 소박 놓았던 점을 스스로 부끄럽게 여기며 장로 직분 받기를 거절했기 때문이다.

동생 서경조의 믿음은 망설임으로 시작됐다. 당시 가톨릭에 대한 박해가 심했기 때문에 선뜻 믿음을 갖지 못했다. 6개월 동안 갈등했던 서경조는 사도 바울이 죽음을 무릅쓰고 복음을 전하는 로마서를 읽고 감동받아 예수를 받아들이고 형과 함께 전도에 나섰다. 서경조는 서울에서 언더우드 선교사에게 직접 세례를 받고, 아들 병호도 언더우드 선교사로부터 유아세례를 받았다. 이는 최초의 유아세례로 기록된다.

서경조는 1901년 우리나라 최초의 신학교인 평양신학교에 입학해 1907년 졸업, 최초의 한국인 목사 중 한 명에 이름을 올렸다. 그와 함께 목사안수를 받은 사람이 길선주 이기풍 양전백 송린서 등 6명이다.

용인=문수정 기자 thursda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