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희조 (3) 초교도 못가는 사람들 보며 장학회 소망

입력 2011-08-07 18:05


아버지는 전형적인 학자 타입이셨다. 그렇게 엄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를 떠올리면 무서웠던 기억밖에 없다. 몸이 약했던 아버지는 결국 내가 17세 때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평생 예수를 믿지 않았지만 죽기 직전에 어머니의 전도로 영접기도를 하셨다.

이제 할머니처럼 어머니도 졸지에 과부 신세가 되셨다. 조용하던 할머니와는 달리 어머니는 강한 성격이셨다. 그런 어머니한테 나는 자주 매를 맞았다. 말을 잘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때리면 할머니는 그런 나를 안고 감싸주셨다. 할머니는 아비 없는 손주가 불쌍하셨는지 한번도 나를 혼내거나 매를 대신 적이 없다. 하지만 어머니는 달랐다. 어머니 말씀대로 따르지 않을 때는 가차 없이 매를 대셨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어머니에게 수없이 맞은 것이 지금의 내가 되는 데 밑거름이 되었던 것 같다. 그런 점에서 받들다시피 하며 키우는 요즘 자녀교육 행태에 대해 못마땅한 점이 많다.

아버지가 없는 집안은 예전과는 완전 딴판이었다. 예전의 위세와 활기는 없어졌다. 한마디로 집안이 폭삭 주저앉아 버린 것이다. 어머니는 내 교육에 온 정성을 쏟으셨다. 당시 우리 동네엔 초등학교 다니는 사람이 나를 비롯해 몇 사람밖에 없었다. 그만큼 형편이 안 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머니는 전답을 팔아 내 교육을 뒷바라지하셨다. 머리는 좋지만 가정형편이 안 돼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또래 아이들을 보며 자연스럽게 지금의 장학회를 구상하게 된 것 같다.

나는 미국이나 일본으로 유학을 가는 게 꿈이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그 꿈은 물거품이 됐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 속 저 밑동에서 스멀스멀 아쉬움과 쓰라림이 올라온다.

일제시대였기에 학교에서도 조선인들은 서러움을 많이 당했다. 대전서 고등학교를 다닐 때였다. 여름방학인데 근로봉사를 나갔다. 일본인 선생이 어디론가 데려갔는데 거기서 선생과 말을 주고받다가 의견 충돌이 일어났다. 내가 급장이었기에 나도 학생들 편에서 선생과 논쟁을 벌였다. 그런데 얼마 후 일본 고등계 형사가 와서 10여명의 학생들을 데리고 가버렸다. 그중에서 3∼4명은 감옥을 보내더니 아예 퇴학을 시켜버렸다. 이런 사건은 우리 학교뿐만 아니라 다른 학교에서도 다반사로 일어났다.

몸은 일제 치하에 일본인 선생이 가르치는 학교를 다녔지만 내 마음은 한시도 일본의 사상에 동조한 적이 없다. ‘일본은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독립이 될 거다’는 게 당시 조선 학생들의 대체적인 생각이었다.

가난과 설움의 세월이었지만 어머니는 조금도 나약한 모습을 보이신 적이 없다. 지금도 눈에 선한 것은 기도하시던 어머니의 모습이다. 어머니는 새벽 이른 시간이면 집 마루에 나와 앉아 울면서 기도하셨다. 이웃집에서조차 시끄러워할 정도였지만 어머니는 아랑곳하지 않으셨다. 아버지의 구원을 위해, 자녀들을 위해, 그리고 나라를 위해서도 기도하셨던 것 같다. 뜨거우면서도 철저했던 어머니의 신앙은 지금의 나를 있게 한 원동력이었다.

내일 모레면 아흔의 나이지만 나는 지금도 전철이나 버스를 타고 어디든지 여행을 다닌다. 음식도 가리는 것 없이 잘 먹는다. 그래서인지 주위에서 내 건강 비결을 묻는 사람들이 많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원인이 하나 떠오른다. 10리가 넘는 교회와 초등학교를 매일 걸어 다닌 것이다. 그것은 내 체력을 길러주고, 신앙과 지식을 살찌웠다.

정리=김성원 기자 kernel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