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허구 교묘히 섞어 소설로 녹인 英 동부 여행기… W.G. 제발트 소설 ‘토성의 고리’

입력 2011-08-05 18:04


독일 출신 작가 가운데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숭배자와 연구자를 거느린 W. G. 제발트(사진)는 2001년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57세의 나이에 사망하기까지 네 권의 소설, 세 권의 시집을 출간했다.

‘이민자들’, ‘아우스터리츠’에 이어 국내에서 번역 출간된 소설 ‘토성의 고리’(창비)는 그가 영국 동부지방을 도보로 돌아보며 쓴 문화고고학적 여행기의 성격을 띠고 있다. 타임즈 리터러리 서플리먼트로부터 “먼 거리를 이동하는 정신적 여행을 기록한 작품 중 최고작”이라는 찬사를 받은 소설은 사실과 허구를 교묘히 섞은 비가(悲歌)의 어조로 역사와 문명의 잔해들을 어루만진다.

“한여름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던 1992년 8월, 다소 방대한 작업을 끝낸 뒤 나는 내 안에 번져가던 공허감에서 벗어나고자 영국 동부의 써퍽 카운티로 도보여행을 떠났다”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소설 제목 ‘토성의 고리’는 토성의 기조력으로 인해 파괴된 달의 잔해들을 일컫는다. 그 고리는 시간의 힘에 의해 파괴된 파편들로 구성되어있다. 파괴의 불가항력적인 성질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그 폐허의 고리는 지구의 어떤 것도 몰락의 운명을 피할 수 없고 인간 또한 그 운명을 벗어날 수 없으며 영원히 남아 공전할 수밖에 없다는 작가의 비극적 인식을 말해준다.

소설은 모두 10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작들처럼 사진이 삽입되어 있는데, 이는 작가 자신이 직접 수집한 것들로 소설의 사실성 강화에 기여한다. 1장에는 작가 자신의 영혼적 동지라고 할 만한 17세기 인물 토머스 브라운이 등장한다. 의사였던 브라운은 영국 노퍽 근처의 들판에서 발견된 단지에 남아 있는 화장(火葬)의 잔해들을 꼼꼼히 관찰하면서 쓴 ‘유골단지’라는 책을 1658년 출간한다. 제발트는 그 책을 세세하게 인용하며 이렇게 쓴다. “브라운은 세월의 흐름을 이겨낸 이런 물건들이 성서에서 약속한 인간 영혼의 불멸성을 상징한다고 여겼는데, 비록 그의 기독교 신앙은 확고했지만 주치의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으로서 내심 인간 영혼의 불멸성을 의심했는지도 모를 일이다.”(37쪽)

4장에는 영국 싸우스월드의 산책로 근처에 위치한 해양박물관에 걸려있는 제1차 세계대전 화보집의 사진들에서 촉발되어 무려 70만 명이 소름끼칠 정도로 잔인하게 살해된 야세노바크 수용소, 우스타샤 수용소에 대한 문서를 추적하는 기록이 담겨져 있다.

이 작품에서 가장 두드러진 점은 역사를 희생자들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다. 이미 청소년 시절에 전쟁과 유대인 학살에 대한 부모 세대의 침묵에 분노했던 제발트는 역사 속의 고통과 파괴를 다가올 미래를 위한 불가피한 희생으로 간주하는 일체의 담론에 근원적인 이의를 제기하며 전체의 미래를 위해 내세워지는 낙관론 자체의 폭력성을 고발한다.

번역자인 문학평론가 이재영씨는 “번역은 개인적으로 지독한 난산이었다”면서 “작가가 현실과 허구, 문학과 자전적 글, 실제 사진과 허구 사진들을 뒤섞어 놓은 것은 작품 전체에 존재론적 불안을 부여하며, 아마도 역사적 지식을 구성하는 지각의 틀 자체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시선의 위조’를 간파하라는 요구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철훈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