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오은영] 익고, 익고, 익고

입력 2011-08-04 17:54


칫칫칫 압력밥솥의 추가 돌아간다. 밥이 뜸 드는 중이다. 사랑하는 이에게 빨리 먹이고 싶어도, 아무리 찰진 쌀이라도 적당 시간 뜸 들지 않으면 설익어 밥맛이 덜하다. 나는 뜸이 들 만큼 시간이 지난 것 같아 추를 젖힌다. 기적소리처럼 칙! 소리가 터지더니 밥 익은 냄새가 부엌을 가득 채운다. 수수, 조, 흑미가 섞인 잡곡밥이라 냄새가 더 구수하다.

갑자기 나는 손을 재게 놀린다. 김치냉장고에서 김치통을 꺼내 뚜껑을 연다. 히야, 매콤새콤 알맞게 익은 냄새! 빳빳하던 푸른 배추가 자신을 죽이고 갖은 양념과 함께 어우러져 적당한 시간 동안 익더니 맛있는 김치가 되었다. 김치 한 쪽을 꺼내 도마에 놓고 푹푹푹 썰어 한 조각 입에 넣고 우적우적 씹는다. 맛깔스럽게 익은 김치 맛이 입안을 채운다.

문득 마을사랑방에 모여 긴 겨울밤을 지내던 옛 농부들 모습이 떠오른다. 익은 김치를 안주로 막걸리를 마시며 새끼 꼬는 농부들. 그 농부들 마을이 ‘나그네’란 시에 나오는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의 그 마을일까? 술이 향취 좋게 잘 익으려면 5∼10일이 걸린다는데 그 농부들 막걸리도 그 시간 동안 익힌 술일까? 나는 별 쓸데없는 생각을 다 하며 냉동실 문을 연다. 언 감을 꺼내 샐러드 소스를 만들기 위해서.

그런데 빨간 감을 보니 술 익는 5∼10일의 시간은 아주 짧게 느껴진다. 손톱만한 초록감이 달콤한 빨간 감으로 익기까지는 뙤약볕 여름 한철이 걸려야 하니까. 그렇게 여름 한철 단맛을 익혀 낸 감들 중에도 가끔 덜 익은 감이 끼어 있다. 입에 넣으면 달고 살살 녹는 잘 익은 감과 달리 그런 감은 떫은맛이 입에 가득 차 견디기 사뭇 힘들다.

갓 시집 왔을 때 시어머님과 나 사이도 떫은 감 같았다. 그때는 어머님이 생각 없이 한 말들이 모두 고까웠고 서운했다. 전화로 안부 인사를 드리면 어머님은 갑자기 전화를 툭, 끊곤 하셨다. 그러면 소심한 난 온종일 안절부절 못하면서 어머님을 야속해했다. 하지만 이젠 똑같은 상황이라도 야속해하지 않는다. 전화 받는 옆에서 누군가 어머님을 화나게 했다는 것을 짐작할 만큼 어머님을 이해하게 된 덕분이다. 감이 익듯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정이 익으려면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그 시절엔 몰랐다.

한편 생각해 보면 내가 어머님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오로지 정이 익었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나이가 든 만큼 내 사람됨도 그때보다는 익었을 테니…. 그런데 밥, 술, 과일은 시간이 흐르면 맛있게 익고, 좋은 냄새가 나지만 사람은 꼭 그렇지 않다. 나이가 어려도 잘 익어 좋은 냄새가 나는 사람이 있고, 나이가 훨씬 많은데도 욕심 탓에 고리고리한 냄새가 나는 사람이 있으니 말이다.

밥상 위에 잘 익은 밥을 퍼놓고, 잘 익은 김치와 잘 익은 홍시로 만든 샐러드를 놓으니 나는 지금 어느 정도 익은 사람인지 궁금해진다. 더디 익어도 좋으니까 계속 익어가기나 했으면 좋으련만…. 익기도 전에 썩어 떨어지는 감, 익기도 전에 타버리는 밥이 안 되기를 바랄 뿐이다.

오은영 동화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