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희조 (2) 할머니·어머니·아내가 내 신앙의 멘토

입력 2011-08-04 20:41


할머니 이나헬 권사는 공주에서 논산으로 시집을 오셨다. 할머니는 공주에서 일찍부터 감리교에서 파송된 선교사가 사역하는 교회에 나가셨다. 아마 공주제일감리교회였던 것 같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던 할머니가 시집을 온 곳은 완전 유교풍의 시골 마을이었다. 전주이씨 이안대군파 100여호가 모여 사는 집성촌이었다. 마을 한가운데 영정을 모신 사당이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할머니는 시집온 지 얼마 안 돼 과부가 되셨다. 과거를 보러 가셨던 할아버지가 편찮으셔서 귀가하시자마자 얼마 안돼 돌아가시고 말았다. 그때 할아버지 나이 23세였다. 할아버지와 동갑이셨던 할머니는 돌도 채 지나지 않은 아버지를 혼자 돌보다시피 하셨다. 하지만 할머니는 그 힘든 세간살이에도 불구하고 문전걸식하는 사람들에게 밥상을 차려 대접하고, 동네 사람들의 어려운 사정을 잊지 않고 쌀 한 톨이라도 도와주는 분이셨다. 그런 할머니를 동네 사람들은 마음으로 존경하고 칭찬해 마지않았다.

할머니의 삶과 신앙은 며느리인 어머니 김기순 장로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할머니는 며느리에게 직접 성경을 가르치셨다. 그때 교회는 마을로부터 10리나 떨어진 먼 곳에 있었다. 교회를 가려면 산길을 가야 했다. 할머니는 며느리를 데리고 매주 그 먼 길을 오가셨다.

그런 할머니에게 언젠가부터 ‘교회를 지어야겠다’는 부담감이 있었던 것 같다. 할머니는 늘 그것을 위해 기도하고 며느리한테도 말씀하시곤 했다. 하지만 교회 설립이라는 오랜 기도는 할머니 생전에는 이뤄지지 못했다. 할머니는 대신 돌아가시기 전에 산을 내놓았다. 살아생전 못다 이룬 교회 봉헌을 대신 해달라는 뜻이었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본가를 허물고 그 터 위에 화악감리교회를 지었다. 재작년에야 준공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교회 옆에는 할머니의 헌신과 봉사의 행적을 기리기 위한 추모비를 세워드렸다. 동네 사람들은 교회를 지나다닐 때마다 그런 할머니를 덕인(德人)이라고 칭찬했다.

어머니도 차츰 신앙이 깊어지면서 할머니가 하셨던 것처럼 가난한 사람들을 먹이고 돕기 시작하셨다. 일꾼들 밥 먹이고 일 시키고 하는 것도 모두 어머니 몫이었다. 새벽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어머니는 항상 부지런하게 사셨다. 할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아버지 역시 41세로 단명하셨다. 어머니는 고난의 세월을 언제나 변함없는 온화함으로 사람들을 섬기고 도우면서 사셨다. 할머니와 닮으신 데가 너무나 많았다.

내 아내 한은희 권사 역시 그런 할머니와 어머니의 모습을 닮았다. 아내는 조용하지만 깊이가 있고 강직했다. 안으로는 자녀들을 잘 교육하고 말없이 내조했다. 아내의 그런 스타일은 교회에서도 변함없었다. 아내는 누구보다 열심히 교회를 섬기고 봉사했지만 이름을 내세우는 데는 나서는 일이 없었다. 아내는 큰 직분도 없었고, 크게 소리 내는 일도 없었다. 다만 교회에서 하는 모든 일을 조용히 도울 따름이었다.

지금의 서울성남교회 사회관을 봉헌하는 데도 아내는 누구보다 기도와 정성을 많이 쏟았다. 하지만 담임목사의 사회관 봉헌계획 선포에도 불구하고 헌금은 지지부진한 상황이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내가 2억원을 먼저 바쳤다. 교회에서는 내 이름으로 봉헌하기를 원했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내 이름보다는 누구보다 말없이 수고하고 헌신한 아내의 이름을 교인들이 기억해주길 바랐다. 아내의 믿음과 헌신은 지금 서울성남교회 사회관 1층 로비에 부조(浮彫)로 새겨져 있다. 아내는 지난 1997년에 나보다 먼저 하늘나라로 갔다.

정리=김성원 기자 kernel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