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신학강좌] 교회의 역사
입력 2011-08-04 18:00
온건파 청교도운동
청교도 운동을 크게 두 부류로 나누는데, 영국국교 안에 기술적으로 남아 있으면서 영국교회를 개혁하고 정화하려는 온건파와 영국국교는 너무 부패해 정화하거나 개혁할 수 없으므로 영국국교에서 떠나야 한다는 분리주의파로 구분된다. 다시 온건파 안에도 장로교파와 독립파가 있으며, 과격한 분리주의파는 회중 교회파와 침례교파로 구분된다.
그중 온건파 청교도 운동부터 생각해보기로 하자. 최초의 장로교 제도를 주장한 사람은 토마스 카트라이트(1535∼1603)다. 칼뱅이 말한 것처럼 감독, 장로, 목사는 신약성서에 동의어로 표현돼 있기에 토마스는 각 교회 신앙훈련과 교회치리를 위해 평신도 장로를 임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목사의 선택은 회중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지 영국국교 감독이 임명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이것을 실제적 장로교주의라고 부르기도 한다.
존 위트기프트(1530∼1604)는 1570년경에 계속 장로교주의를 발전시킨 사람이다. 그는 목사와 평신도가 함께 모여 설교와 토론을 위해 대화를 나누는 이른바 ‘예언하기’ 모임을 제안했다. 제임스 1세가 영국 왕으로 다스리기 시작하면서(1603-1625) 청교도들은 많은 시련을 겪게 됐다. 1603년 4월 청교도들이 청원서를 제출해 1604년 1월 햄프턴 궁전(Hampton Court)에 감독들과 청교도들이 국왕 입회하에 모였는데 아무런 교회정치적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말았다. 왕은 “감독이 없으면 국왕도 없다”(No Bishop, No King)고 선언했다. 다만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기를 결정하였는데, 그것이 그 유명한 ‘킹 제임스 성경((KJV·King James Version)’ 혹은 ‘흠정역(Authorized Version)’으로 세상에 나오게 됐다(1611).
1581년 앤드루 멜빌의 인도 하에 청교도의 총회가 장로들을 교회의 지도자로 그 권위를 인정했고, 장로교 교리를 장정으로 만들었으며, 1592년에는 스코틀랜드 국회가 장로교 체계를 법으로 정착시키길 결의했다.
영국 왕 제임스는 자치통치의 장로교 제도에 반대해 국왕이 지배하는 감독제에 복종할 것을 결정하고, 멜빌을 비롯한 지도자들을 귀양 보내기에 이르렀다.
제임스가 죽고 찰스 1세가 왕위에 오르자 윌리암 로드(1573∼1645)를 켄터베리 대주교로 임명하게 됐다. 로드는 앵글로 가톨릭 전통(가톨릭과 영국성공회를 혼합한 전통)을 다시 살리고 의식과 예복과 예배를 통일시키기를 시도했다. 또한 찰스 왕의 정치적 문제에 대한 중요 상담자 역할을 하게 됐다. 제임스 왕 때 나왔던 ‘스포츠서(Book of Sports)’가 찰스 왕 때 다시 나오게 됐다(1620년). 이는 주일에 스포츠, 게임, 춤 등을 허용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치적, 종교적 부패 현상을 보고 청교도들은 절망하기 시작했고 미국으로 이주해 가는 것을 계획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1620년부터 1640년 사이 무려 2만여명이 대서양을 건너 종교적 해방을 위해 미국으로 이주해 갔을 뿐 아니라 칼뱅 신학에 입각해 신정정치의 이상을 정치적으로 이룩하는 제2 이스라엘, 제2 가나안의 꿈을 갖는 정치적 해방을 위해 대서양을 건너게 됐다.
김홍기 감리교신학대학교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