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중국에 굽신거릴 날 멀지 않았다… ‘시빌라이제이션-서양과 나머지 세계’
입력 2011-08-04 21:37
시빌라이제이션-서양과 나머지 세계/니얼 퍼거슨/21세기북스
이 질문을 기억하기 바란다. 앞으로 당신이 줄곧 품게 될 의문일 테니까. 어쩌면 21세기 초반은 이 질문 하나로 기억될 수도 있겠다. 세계적 석학들이 이미 한번쯤 물었고, 지금도 묻고 있는 질문. 서구는 왜 실패했는가. 혹은 서구는 왜 실패를 향해 달려가는가.
이번에는 파이낸셜타임스와 뉴스위크 칼럼니스트인 경제사학자 니얼 퍼거슨 하버드대 역사학과 교수가 도전했다. 전작 ‘금융의 지배’에서 ‘차이메리카(차이나와 아메리카의 합성어)’라는 글로벌 유행어를 만들어냈고, 2009년에는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교수와 미국 경기부양책을 놓고 지상혈전을 벌였던 세계적 이슈메이커다.
퍼거슨은 역사학자 다운 발상을 했다. 서구의 몰락을 이해하려면 500년 전 서구의 부상과 중국의 실패를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질문은 이렇게 바뀐다. 가난하고 분열돼있던 유럽은 중국과 인도 등 거대한 아시아 문명들을 어떻게 넘어섰는가. “과거 서양 패권의 원인을 알아야 서양의 몰락 시점이 얼마나 임박했는지 짚어낼 수 있기 때문”이라는 논리다.
1420년대 유럽과 중국을 비교한다면, 서양의 부상은 퍼거슨의 말처럼 “500년 내에 벌어진 가장 걸출한 역사적 현상”이라 할만하다. 그만큼 동·서양의 격차는 컸다. 동양 제국은 거대했고, 유럽의 삶은 더럽고 가난하고 야만적이었다. 양쯔강에는 연간 1만2000척의 곡물 바지선이 통과했고, 난징에는 50만 명이 넘는 인구가 거주했으며, 1만1000권 분량의 세계 최대 백과사전 ‘영락대전’이 간행됐다. 영국은 어떤가. 1540∼1900년 런던 거주자의 평균수명은 30세에 못 미쳤다. 하수도 시설조차 없었던 런던 거리의 악취는 끔찍했다.
이런 격차를 한 순간에 역전시킨 비기. 서구에는 있었지만 동양에는 없었던 것. 퍼거슨은 경쟁, 과학, 재산권, 의학, 소비사회, 직업윤리의 6가지를 꼽았다. 과학기술과 의학의 발전이 익히 지적돼온 서구의 경쟁력이라면, 나머지는 딱히 주목받은 적이 없던 특징들이다. 특히 ‘불안정이 불러온 경쟁’이라는 개념은 주목할만하다. 퍼거슨 논리의 뼈대이다.
오스만제국, 명나라와 청나라, 무굴제국 등 거대 제국을 형성하고 있던 동양과 달리, 16세기 유럽은 쪼개지고 갈라진 모래알이었다. 무려 500개 안팎의 크고 작은 국가들은 향신료 무역권 등을 놓고 사활 건 혈투를 벌였다. 전쟁은 일상이었다. 1500∼1799년 스페인은 81%, 영국은 53%, 프랑스는 52%의 기간 동안 늘 누군가와 싸우고 있었다. 놀랍게도 전쟁은 번영을 가져왔다. 기술발전과 교역을 촉진하고 조세제도가 정비가 정비되는 부수적 효과까지 낳았다. 힘의 불균형이 경쟁을 낳고 경쟁이 진보의 동력이 된 것이다.
개인의 재산권이라는 개념도 시작은 서구였다. 재산권에 대한 강조는 산업혁명 이후 서구 사회에 몰아닥친 소비문화와 함께 자본주의의 토대를 닦았다. 개신교의 부상이 가져온 직업윤리의 변화도 혁명적이었다. 종교개혁 이후 탄생한 개신교는 근검절약과 성실한 노동이 신앙의 한 표현이라는 믿음을 전파시켰다.
이 모든 비법을 아우르는 서구의 경쟁력은 결국 ‘제도’로 요약된다. 퍼거슨은 제도가 갖는 힘에 대해 설득력 있는 증거 하나를 내놓았다. “문화가 거의 비슷한 두 무리의 독일인(동·서독)과 한국인(남·북한), 중국인(중국·대만)에게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라는 각기 다른 제도를 적용한 결과는 매우 놀라웠다. 다른 제도는 거의 즉각적으로 다른 행동방식을 가져왔다.”
다시 처음의 질문이다. 6가지 비기를 소유한 서구는 어쩌다 문명사적 몰락을 맞이하게 됐는가. 답은 의외로 쉬웠다. 중국은 이미 자본주의를 가졌다. 이란에는 과학이, 러시아에는 (비록 속임수가 섞이긴 했지만) 민주주의가, 터키에는 소비사회가 만개하고 있다. 서구를 우월하게 만들던 것들을 더는 서구가 독식할 수 없게 됐으니 비기는 더 이상 비기가 아니다. 이제 남은 건 내리막길뿐인가.
“우리는 서양 패권 역사 500년의 끄트머리를 통과하고 있다.” 저자의 관측이다. 구세희·김정희 옮김.
이영미 기자 ym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