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의 또 다른 얼굴은 가짜와 거짓말… 팜므파탈의 파멸 그린 서하진의 장편소설 ‘나나’

입력 2011-08-03 21:29


반라의 여인이 하얀 네글리제를 입고 침대 위에 걸터 앉아있다. 왼손은 쇄골 위에, 오른손은 허벅지 위에 각각 올려져 있고 시선은 밖을 향하고 있다. 응시하는 곳은 철창으로 둘러쳐진 정원의 바깥쪽이다. 정원 안쪽은 시멘트 바닥의 테라스다. 메마르고 건조한 시멘트 바닥은 정원의 싱그러운 풍경과는 대조적이다. 뇌쇄적인 매력을 지닌 팜므파탈의 탄생과 파멸을 그린 소설가 서하진(51)의 장편 ‘나나’(현대문학)의 표지는 정원 안쪽과 바깥쪽 풍경 가운데 하나는 가짜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소설은 제목에서부터 프랑스의 소설가 에밀 졸라(1840∼1902)의 동명 소설 ‘나나’를 연상시킨다. 사회 환경이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을 계보학적 접근으로 보여주기 위해 에밀 졸라가 만들어낸 파리의 여배우 ‘나나’는 조상으로부터 광기와 나태와 도취를 물려받은 신경질적 기질의 인물이다. 이에 비해 서하진의 ‘나나’는 사업을 호기롭게 꾸려갔지만 말에 진실성이 없고 거짓말을 자주 하곤 했던 친아버지와 고상한 화가이자 우아한 교수로 살았던 친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나나’의 양가적 모습을 보여준다.

“나나가 거짓말쟁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오래,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 애는 이해할 수 없는, 도무지 왜 그러는지 알 수 없는 거짓말들을 늘어놓기를 즐겼다. 첫 거짓말은 상당히 거창했다. 일곱 살 때 유괴를 당했다는 거였다.”(36쪽)

나나는 어렸을 때부터 본능에 가깝게 이야기를 꾸며내며 자란다. 친부가 부재하는 이유를 환상적으로 가공하기도 하고 열일곱 살 땐 자신의 마음을 외면하는 의붓오빠 인영을 궁지에 몰아넣는 유혹적인 무대를 연출하기도 한다. “새초롬히 눈을 내리깔고 설명을 듣던 나나가 가만히, 그저 그런다는 듯 인영의 어깨에 손을 얹고 천천히 쓰다듬었다. 나나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움직일 때마다 인영의 심장은 죄어들었다.”(39쪽)

아버지의 재혼으로 의붓여동생 나나를 얻게 된 인영은 나나의 유혹으로 벗어나기 위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지만 나나의 유혹은 더욱 집요해진다. 인영을 찾아 미국에 온 나나는 인영의 육체를 무너뜨린 후 한국으로 돌아온다. 갖고 싶은 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손에 넣고 마는 나나는 모든 여자들이 꿈꾸는 ‘나쁜 여자’의 표상이기도 하다. 타인을 조종하고 기만하며 거짓 수렁으로 이끌어가면서도 육체적으로 산뜻하고 우아한 활기를 잃지 않는 나나의 모습은 그녀가 처한 환경의 맥락에서 지극히 자연스럽게 발현된 것이다.

미래에 대한 야망을 위해 더 큰 권력과 부를 손에 넣고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나나는 비엔날레 총감독으로 선임 받고자 졸업장을 위조하고 선임과정에 절대적인 책임을 지고 있는 두 명의 남자를 그녀만의 방법으로 회유하기도 한다. 능수능란하게 거짓말을 함으로써 더욱 아름다워지는 팜므파탈이야말로 서하진이 탄생시킨 ‘나나’인 것이다.

하지만 소설은 비극으로 끝난다. 작가는 나나가 괴한에게 일격을 당해 쓰러져 의식불명의 상태에 빠지는 것으로 소설을 매듭지음으로서 나나를 용서하지 않는다. 서하진은 “2007년, 신정아를 비롯한 가짜 학력 사건이 연달아 불거졌을 때 가짜와 거짓말은 우리 사회의 또 다른 욕망을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며 “그때부터 소설을 구상했다”고 말했다.

정철훈 선임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