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문일] 학력 격차와 짝짓기
입력 2011-08-03 17:55
“행복도 사랑도 성적순은 아닐 겁니다. 시간을 들여 보시길…”
소설입니다. 정사(情死)를 하려는 젊은 남녀가 있습니다. 홍콩 명문가의 남자와 그 연인입니다. 남자에게는 어릴 때 집에서 정해 준 결혼 상대가 있습니다. 열매를 맺을 수 없는 사랑에 극단적 선택을 한 것이지요. 두 사람은 배를 빌려 마카오 서쪽 바다까지 저어간 뒤 함께 물에 빠집니다.
어부가 허우적대는 여자를 구합니다. 살아난 여자는 집에 돌아갈 면목이 없습니다. 고아인 어부는 마침 일본의 고베로 가서 선박 페인트칠 기술자인 친척에게 의지하려던 참입니다. 어차피 죽은 몸이라고 생각한 여자는 자기도 데려가 달라고 부탁합니다.
고베에 온 남녀는 방 두 칸짜리 집을 빌려 각방을 쓰기로 약속합니다. 여자가 옛 정인(情人)에 대한 의리를 내세운 것이지요. 남자는 선박 도장공으로 일합니다. 여자는 일본말을 모른다는 이유를 대고 좀체 집을 나서지 않아 장보기까지 남자의 몫이 됩니다. 실은 광둥어와 간단한 일본어밖에 모르는 남자와 달리 여자는 베이징어와 영어를 구사하고, 일본어도 남자보다 잘합니다. 국제도시 홍콩에서 명문가 자제와 교제할 정도의 배움이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던 어느 날, 여자는 우연히 옛 정인과 닮은 남자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여자에게 변화가 일어납니다. 옛 남자를 마음속에서 씻어낼 수 있게 된 것이지요. 여자는 8년 동안 자신을 기다린 남자와 방문을 닫지 않고 살게 되었습니다. 부부는 동네에 자그만 중화요리점을 냅니다. 음식점은 번창합니다. 부부는 도쿄로 옮겨 점포를 다섯 개나 낼 만큼 성공합니다. 자녀도 셋이나 낳았습니다. 여자는 고베를 떠난 지 35년 만에 60대 중반 나이로 병사합니다.
그런데 어부가 여자를 구한 건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동료 어부로부터 동반자살이 있을 거라는 귀띔을 받은 것입니다. 남자가 거금을 주며 ‘근처 섬에 배를 대고 있다가 자기만 구해 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이지요. 분개한 어부는 동료 몰래 근처 바다에 배를 띄우고 있다가 여자를 구했습니다.
어부는 여자가 죽을 때까지 남자의 배신을 감춥니다. 여자의 로망을 지켜주려 한 것이지요. 그러나 여자는 알고 있었습니다. 부둥켜안고 물에 빠진 남자가 의식이 흐릿해진 자신의 가슴을 밀쳐낸 것을, 잠시 물 위에 떠올랐을 때 헤엄쳐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여자는 보았던 것입니다.
중국계 일본 작가 진순신이 고베의 화교사회를 소재로 한 연작소설 중 한 편입니다. 소설의 화자는 여자가 어부와 부부가 되는 계기를 만든 사람입니다. 여자의 옛 정인과 닮은 남자이지요. 소설은 실화일 수도, 아닐 수도 있습니다만 남녀의 사랑에 대해 시야를 넓혀줍니다.
얼마 전 한 방송의 짝짓기 프로그램에서 명문대 졸업반 여대생이 치과의사의 구애를 마다하고 고등학교만 나온 자동차정비사를 선택했습니다. 경쟁자의 현란한 프로포즈와 다르게 정비사는 자신의 마음을 대신할 노래를 MP3 플레이어에 담아 여자에게 들려줍니다. 1주일 합숙이 끝나자 여대생은 훌쩍이며 자신의 감정을 따릅니다.
많은 시청자들이 여자의 선택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반면 동정은 오래 가지 못한다고 진단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여대생은 쾌활한 성격으로 여러 남자들이 호감을 품었습니다. 정비사는 성실하고 심성이 고와 보였지만 대학생들의 MT 같은 촬영 분위기를 불편해했습니다. 선택은 서로 진지하게 사귀어 보자는 합의일 뿐입니다. 방송 후 두 사람이 길게 이어지지는 못 했다는 소식입니다. 주눅 들어 보이던 남자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여자와의 학력 차이에서 비롯될 사회적 장벽 앞에서 지레 위축되었던 것은 아닐까요. 고교생의 대학진학률이 80%에 이르고 공공기관의 고졸자 채용률이 1%에 불과한 우리 사회이니까요.
그래도 그런 게 다는 아닐 겁니다. 소설의 여자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관계를 궁금해 하는 딸에게 “사랑은 세월을 들여서 키우는 것”이라는 말을 유언으로 남깁니다. 소설의 여자가 사랑을 키운 비법을 방송의 남자가 알았더라면 좀 더 자신을 가졌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행복뿐 아니라 사랑도 성적순은 아닐 겁니다.
문일 카피리더 norwa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