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조미자] 호박꽃 등불이 있는 집

입력 2011-08-02 17:50


전에 살던 집의 경비아저씨가 등기를 받으러 오라고 했다. 집 가까이 들어서니 자주 다니던 문구점이 보인다. 편지를 부쳤던 우체통도 그대로다. 빵집에서는 고소하고 달콤한 풍미가 느껴졌다. 엔진오일을 갈러 다니던 카센터의 상호 아크릴이 떨어져나가 있다. 모르는 사람들이 지나가는데도 왠지 전부터 아는 사람같이 보인다. 나도 모르게 인사를 할 것 같다.

살던 집은 1층이었다. 뜨락의 나무들은 우리가 떠났을 때보다 우거져 있었다. 처음 이사왔을 땐 정원이 조성되어 있지 않은 탓에 창을 열면 거실 안이 들여다보였다. 마침 아파트 뜰을 조경하고 나가는 트럭 뒤를 쫓아가 나무 한그루 심어달라고 사정을 했다. 그랬더니 내 키의 반 정도 되는 목련 묘목을 심어주고 갔다. 그게 이제는 아파트 3층 높이까지 가지를 뻗어 울창한 잎을 펼치고 있다.

아버지 약을 사러 자주 들렀던 약국을 보니 부모님 생각이 났다. 부모님은 남겨줄 재산이 없다며 맞벌이를 하는 우리를 위해 아이를 키워주겠다고 했다. 아이들이 어느 정도 컸을 때 부모님은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차로 모신다고 해도 벌써 저만치 떠난다. 중절모를 눌러쓰고 균형이 맞지 않는 걸음걸이로 서로를 의지했던 뒷모습이 눈에 선하다. 여덟 남매를 키우고 손자까지 보느라 무릎이 약해진 모습을 그때야 알아챘다.

핸드폰이 없던 시절 산책 나왔다가 전화를 걸던 하늘색 전화 부스도 서있다. 고등학교에 다니던 아들이 갑자기 숨이 차다며 전화를 했다. 어디냐고 물었더니 수원이라고 했다. 내비게이션도 없던 시절, 주변의 건물 이름 하나 듣고 갔더니 아이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숨을 가쁘게 쉬고 있었다. 뒷좌석에 밀어 넣고 무조건 응급실로 향했다. 한숨 돌리려고 하는데 의사가 불렀다. 급성심근경색이라는 것이다. 성인 남자 둘 중에 하나는 사망이라고 했다. 중환자실로 들여보내고, 어린 나이에 저 세상으로 보내면 어쩌나 하며 다시는 잔소리로 닦달하지 않을 거라고 수천 번 다짐했다.

먼 곳으로 발령이 나서 가족과 함께 살 수 없던 몇 년간, 식구들은 저마다 독립군처럼 살았다. 나는 밤마다 독립군 1, 2, 3의 활동을 전화로 물었다. 그런 중에 아이들의 수능시험을 멀리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수능 전날, 어둠을 뚫고 달려와 보온밥과 따뜻한 차를 건네며 아이의 어깨를 도닥여 주었다. 어둠이든 미명이든 슬픔이든 환희든 집은 가족을 모이게 하는 구심점이다.

어둠이 내리면 마른 빨래를 걷고, 상추를 흔들어 씻었다. 된장찌개를 끓이며 현관문을 열어두었다. 늘 호박꽃 암술처럼 싸안은 주홍 불빛이 창밖으로 비치도록 불을 켜두었다. 그건 기다림이고 그리움이었다. 가족 하나하나가 씨실이 되고 날실이 되어 삶의 무늬를 짜나가는 일이 이토록 귀하고 소중했던가. 몸이 한 차례 떨려왔다. 내 안에 숨죽이고 있던 생명력이 태동처럼 꿈틀거리는 걸 느꼈다.

조미자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