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손수호] 주소는 삶의 뿌리인데…
입력 2011-08-01 17:51
최근 주소에 대한 두 개의 뉴스를 접했다. 하나는 행정안전부, 다른 하나는 서울시에서 나온 것이다. 같은 정부지만 생각이 다르고, 절차가 다르다. 중앙은 숫자가 가진 경제적 가치를 선호하고, 지방은 이름에 담긴 문화적 의미를 존중한다. 그 차이가 크다.
행안부는 지난달 29일 도로명 주소를 고시했다. 기존의 지번을 버리고 도로에 바탕을 둔 표기방식을 마무리 지었다. 큰 도로는 ‘대로’, 중간도로는 ‘로’, 기타 도로는 ‘길’로 나누어 구획했다. 일제시대에 만들어진 지번 중심의 시스템을 100년 만에 바꾸기로 했다.
서울 중구는 신당1∼6동까지의 행정동 이름을 환원키로 했다. 행정편의에 따라 숫자 나열식으로 이름을 붙이는 바람에 장소의 역사성이 사라졌다는 반성이 있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살았던 동화동이 신당6동,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집이 있는 청구동을 신당4동으로 바꾼 것이 잘못됐다는 것이다. 신당동 전체 주민에게 의견을 물어 결정한다.
공동체의 기억 없애는 정부
둘 다 변화를 지향하지만 나는 서울시 방식이 마음에 든다. 박정희 김종필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름의 의미를 존중하는 태도가 좋다. 행안부는 우리 삶의 두께를 과소평가하는 경박함, 물류비용을 줄인다는 목적으로 공동체의 기억을 지우는 우를 범했다. 어정쩡한 타협은 더욱 궁상맞다.
예를 들어 보자. 기존 주소는 ‘서울시 서초구 서초동 1540 래미안 아파트 ○○○동 ○○○○호’였다. 행안부가 수천억 원을 들여 바꾼 주소는 ‘서울시 서초구 반포대로 58, ○○○동 ○○○○호(서초동, 래미안 아파트)’다. 얼마나 좋아졌나. 주소에 포함된 괄호는 또 뭔가. 이런 기형적 형태로 삶의 근거를 온전하게 나타낼 수 없다.
사정이 이렇게 된 데는 사연이 있다. 원래는 길 이름과 번호만 표기하려 했으나 서울 강남지역을 중심으로 재산권 침해 주장이 나오자 뒤늦게 괄호를 만들었다고 한다. 세월이 지나면 괄호를 떼어 내겠다는 뜻이다. 실제로 행안부 간부들의 명함에는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 209, 1410호’로 돼있다. 노출을 꺼리는 흥신소 주소 같지 않은가.
잘못은 정부의 짧은 생각에서 비롯됐다. 주소를 하나의 점으로 보았기에 그곳을 찾는 데 드는 비용만 생각했다. 그러나 주소는 존재의 정체성을 상징한다. 하나의 점이 아니라 총합이다. 한 사회로서는 소중한 문화콘텐츠다. 그런데도 이를 번거로운 짐처럼 여기니 버리고 싶어진다. 새 주소에 따르면 양귀자가 소설로 쓴 ‘원미동’은 ‘부천로’, 박경리의 ‘토지’에 나오는 ‘평사리’는 ‘악양서로’가 된다.
주민센터가 그대로 있고 토지와 관련된 공부(公簿)에 존재하므로 동네 이름이 남는다는 주장도 허무하다. 개인이 평생 몇 번의 부동산 계약서를 쓰겠나. 주소와 명함에 동네가 사라지면 머릿속에서도 사라지게 마련이다. 존재가 의식을 지배하는 것은 상식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주소처럼 사회적 기반 자체를 바꾸는 사안은 구성원의 깊이 있는 논의를 거쳐 사회적 합의를 끌어내는 노력이 필요한데도 정부는 무엇에 쫓긴 듯 경제적 효과만 강조하며 일사천리로 밀어붙였다. 길 이름 새로 짓느라 수천 명의 향토사학자를 활용하면서도 정작 향토의 바탕인 동네 이름을 버린 것이다.
시스템 보완해 洞名 살리길
그럼 어쩔 수 없이 이 왜곡된 주소를 써야 하나. 시민단체는 지금도 늦지 않았다며 전면 백지화를 요구한다. 앞으로 주민증과 운전면허증 등을 바꾸는 데 드는 비용과 번거로움을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행안부는 한번 만들어진 시스템을 교체하는 게 쉽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나 시스템 문제는 사람의 문제, 역사와 전통보다 덜하지 않을까. 아직 국민들이 잘 몰라서 그렇지, 실상을 알면 저항이 만만찮을 것이다. 주소는 삶의 뿌리이고, 새 주소는 이 뿌리를 폭력적으로 뽑아내기 때문이다.
손수호 논설위원 nam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