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이철환] 별이 뜰 때까지 우리는
입력 2011-08-01 17:42
“현대인은 버펄로를 닮았다. 높이보다 깊이를 고민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으면”
문명과 거리가 먼 오지의 사람들 중엔 지금도 버펄로 사냥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마구 총질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전통적인 방법으로 버펄로를 사냥한다.
들판에서 수많은 버펄로 떼를 발견하면 원주민이 한쪽으로 다가가 새끼 버펄로 울음소리를 낸다. 가짜 울음소리로 버펄로 무리를 이끌고 가는 암컷의 모성애를 자극해 절벽이 있는 쪽으로 유인하는 것이다. 버펄로 무리가 아무것도 모른 채 절벽을 향해 가고 있을 때, 원주민들은 함성소리를 내며 뒤쪽에서 버펄로 무리를 공격한다.
도망치는 버펄로들은 눈앞에서 절벽을 만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쫓기며 달려오는 버펄로 무리들이 뒤쪽에서 사정없이 몸을 부딪쳐오면 앞쪽의 버펄로들은 꼼짝 없이 절벽 아래로 떨어지고 만다. 많은 버펄로들이 허공을 날며 절벽 아래로 무참히 떨어지면, 대기하고 있던 원주민들이 화살이나 창이나 돌망치로 죽어가는 버펄로들의 숨통을 끊는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도 어쩌면 버펄로를 닮아 있다. 높이를 향한 집단적 믿음이 사람들을 벼랑 끝으로 몰고 있다. 높이를 만드는 건 깊이일 텐데, 깊이를 고민하지 않고 높이만을 좇는 사람들이 많다. 깊이 없는 높이가 얼마나 처참히 무너지는가를 최근 우면산의 아까시나무들은 말해주지 않았는가. 문명이 만들어낸 첨단기기로 무장된 사람들은 입을 모아 세상 살기 좋아졌다고 말한다. 아프리카 지역에선 배고픔과 질병과 오염된 물 때문에 7초에 한 명씩 어린 아이가 죽어가고 있는데 세상이 풍요로워졌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배불리 먹고 문화생활도 한껏 누리는 낭만적 사회조차도 불안의 복선을 안고 현대를 살아가고 있다. 우리의 삶은 과거와 많이 달라졌다. 물질적으론 이전보다 풍요로워졌지만 사람들의 절망은 이전보다 깊어졌고, 사람들 간의 불신도 이전보다 깊어졌고, 미래에 대한 불안도 이전보다 깊어졌다.
세상은 더 이상 인간의 논리로 인간을 바라보지 않고, 자본의 논리로 인간을 바라보려고 한다. 심지어는 독설까지도 미담의 장르가 되고 말았다.
많은 사람들이 삶은 물질과의 싸움이라고 힘주어 말하고 있다. 타당성 있는 말이지만, 삶은 궁극적으로 정신과의 싸움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화려함과 외설과 가면이 넘쳐나는 세상일수록 소박함과 순수함과 진정성은 더 높이 평가받을 수 있을 것이다. 오래 전 신분사회에선 누구도 천민들의 가난을 욕하지 않았다. 천민들은 마땅히 가난할 수밖에 없었고, 천민들 또한 자신의 가난을 운명처럼 받아들였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게으르고 무능해서 가난한 거라고, 사람들은 보이게 혹은 보이지 않게 손가락질하는 터라 사람들의 불안은 더욱 커졌다.
전대미문의 화려한 문명 속에서 수많은 상품들이 사람들의 욕망을 자극하고 있다. 욕망하는 것들을 가질 수 없을 때 사람은 불안을 느낀다. 명품시장이 호황을 누리는 것도 사람들의 불안과 관련 있을 것이다. 상품의 세련미 때문에 명품을 구매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가난을 감추고 싶어 혹은 부를 이야기하고 싶어 명품을 구매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이런 맥락으로 본다면 명품은 풍요의 상징이면서 결핍의 상징이 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명품에 집착하는 사람들을 향해 삶의 진정한 가치를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함부로 말할 순 없을 것 같다. 자신의 가난을 감추고 싶어 명품을 욕망하는 사람이 가난 때문에 당했던 상실의 기원을 그 누구도 가늠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의 불신과 불안은 분명, 그들이 살아낸 시간의 상처와 맞닿아 있을 것이다. 그 상처는 인간의 본원적 욕망이 만든 상처이기도 하겠지만 현대문명이 인간에게 입힌 상처도 많을 것이다.
모두에게 아름다운 건 없고 언제나 아름다운 것도 없으므로 인간은 상처받을 수밖에 없지만, 지금보다 행복한 사람들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 높이보다 깊이를 먼저 고민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세상, 자본의 논리가 아닌 인간의 논리로 인간을 바라보는 따뜻한 세상이 됐으면 좋겠다.
이철환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