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김세원] 마중물

입력 2011-07-31 17:56


어린 시절 외가 마당에 있는 펌프에서 물을 퍼 올리고 싶어 팔짝팔짝 뛰어 오르며 팔목에 온 힘을 주어보지만 마른 빈 펌프에서는 쿨럭쿨럭 쇳소리만 날 뿐 물은 나오지 않았다. 외할머니가 한 바가지의 마중물을 붓고 펌프질을 하면 드디어 깊은 땅 속에서 맑고 차가운 지하수가 힘차게 콸콸 물줄기를 쏟아냈다. 그 광경이 신기하고도 재미있어 환호하며 소리치던 기억이 있다.

물 한 바가지가 내려가 물길 있는 곳까지 마중을 나가야 기다렸다는 듯 펌프를 통해 지하수가 올라와 시원하게 쏟아지는데 어른들은 이 물을 대통물이라고 했다. 이 물로 등목을 하며 더위를 잊기도 하고 수박이나 참외를 담가 놓았다가 평상에 둘러앉아 한 쪽씩 손에 들고 입에 물던 기억이 있다.

땅속 깊은 지하수를 불러 올린 한 바가지의 마중물은 버려지는 물이 아니라 엄청난 지하수를 끌어올릴 수 있는 에너지원이다. 지하에 아무리 질 좋은 샘물이 있다 한들 단 한 바가지의 마중물이 없으면 퍼 올릴 수 없는 것이다. 그 마중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목마름에서 벗어날 수 있고 생명을 유지할 수 있으니 살리는 힘을 가진 희망의 물이며 근간이 되는 물이다.

사람 중에도 마중물과 같은 사람이 있다. 마음 깊이 잠겨 있는 정수를 퍼 올릴 수 있는 그 처음물을 품은 사람.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남모르게 땀 흘리며 봉사활동에 나섰다가 이번 집중호우로 인한 산사태로 숨진 대학생들이야말로 이 사회에 마중물과 같은 존재들이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삶에 그대로 적용한 의인들이다.

누군가가 더 행복해질 수 있도록 멈춰진 펌프를 다시 움직여 땅 속 깊은 곳에서 대통물이 솟아나길 기대하며 부어진 마중물이 그들이다. 마중물의 역할을 한 그들이 있으니 그 사랑의 손길을 받은 이들은 콸콸 솟구쳐 오르는 대통물로 이 사회에 기여하며 다른 누군가에게 마중물의 역할을 하게 될 것을 기대한다. 사랑의 펌프질이 멈추지 않아 생명수가 계속 쏟아지도록.

베푸는 손을 가진 마중물과 같은 사람이 필요한 때이다. 이것조차 아까워 움켜쥐고 있거나 목이 마르다고 혼자 다 마셔버린다면 메마른 모래사막을 걸으며 서로에게 원망의 눈길을 보내는 일밖에 없을 것이다.

감사하게도 아무리 경쟁이 치열하고 극단의 이기주의가 판을 친다 해도 누군가의 미래에 밝음을 주기 위하여 잠재력을 끌어내는 마중물로 자신을 드리는 사람은 반드시 있다. 작아도 옹골찬 마중물의 힘이 있어 이 사회가 썩은 물로 고여 있지 않고 유유히 흐르는 강물로 존재하는 것이리라.

십일조도 마중물이 아닐까. 금전이 아니더라도 달란트, 시간, 지식 등 가진 것의 일부를 드림으로 필요한 곳에 한 바가지의 마중물을 공급한다면 소외된 삶에 빛이 되고 따뜻한 생명수가 되어 진실한 기쁨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드릴 수 있는 나의 마중물은 무엇인지 생각해본다.

김세원 방송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