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살 여대생·길고양이 외로운 상처 보듬는 동반자… 황인숙 소설 ‘도둑괭이 공주’
입력 2011-07-29 17:55
어느 여자대학 기숙사 앞에서 고양이와 대화를 나누는 여대생을 본 적이 있다. 거의 매일 오후 5시 무렵에 빵조각과 우유를 건네는 여대생 주위를 고양이는 꼬리를 빳빳하게 치켜세운 채 맴돌다가 슬쩍 몸을 기대기도 한다. 그럴 때면 당신의 외로움을 내가 알고 있다고 속삭이듯, 고양이는 몸을 평소보다 두 배나 늘이곤 하는 것이다.
“이 다음에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윤기 잘잘 흐르는 까만 얼룩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사뿐사뿐 뛸 때면 커다란 까치 같고/ 공처럼 둥글릴 줄도 아는/ 작은 고양이로 태어나리라”(‘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1984년 데뷔 시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에서부터 고양이를 동반자 삼아 살아온 황인숙(53) 시인의 장편소설 ‘도둑괭이 공주’(문학동네)는 집 없이 거리를 헤매는 길고양이들과 조숙한 스무 살 아가씨 화열의 우정과 교감을 그린다.
“마티즈 주인집 할머니가 밥을 놓지 말라고 엄포 놓으신다. 삼색이 고양이 세 자매가 울면서 계속 따라온다. 애들이, 산통 다 깰라 그러네. 얼른 하얀 소나타 밑에 밥그릇을 밀어 넣는다. 고양이들이 앙앙 소리를 내며 오드득오드득 밥을 먹는다.”(9쪽)
삼색이와 베티와 아비는 화열이가 돌보는 길고양이이지만 화열 역시 외롭기는 마찬가지다. 사업 실패 후 흔적 없이 사라져버린 아버지, 마음의 빈 곳을 채우지 못해 떠나버린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한 번도 제대로 정을 받아본 적 없이 자랐기 때문이다. 화열이 혼자 살고 있는 재개발 직전의 낡은 시장 건물 2층 방은 비가 오면 망가지는 길고양이들의 스티로폼 집을 연상시킨다. 사람에게 버림받은 후 사람을 잘 믿지 못하는 길고양이들과 화열은 닮아 있다. 특히 뚱뚱하지만 얼굴이 작고 예쁜, 비탈 고양이 베티와는 특별한 우정이 이어진다.
하지만 버림받은 고양이들의 민첩하고 명랑한 몸짓에 치유를 받는다 해도 화열이가 정말 의지할 곳은 사람들의 세계다. 다시 고양이로 태어나지 않는 이상 말이다. 그런데 화열이도 채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화열의 곁을 파고든 사람들이 있다. 인터넷 카페 ‘고양이웃네’ 회원들, 화장품 방문판매를 하며 유학을 준비 중인 혜조 언니, 반지하방에서 두 아이를 키우며 사는 바리이모, 소설가를 꿈꾸는 튕클 언니…. 가족에게서 받은 치명적 상처는 이렇게 바글거리는 이웃들 틈에서 서서히 아물기 시작한다.
“고양이는 기억력이 좋지 않다고 한다. 길어야 여섯 달이 지나면 다 잊어버린다고 한다. 그래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가슴 아픈 일이 너무 많은데 어떻게 살겠어?”(76쪽)
가방 안에 사료와 때때로 간식 캔과 햇반 그릇을 들고 매일 같은 시각, 같은 장소를 찾는 화열처럼 작가도 고양이에게 밥을 주고 있다. 벌써 5년째다. 2년 전부터는 하루에 두 번씩이다. 소설에서도 나오듯, 골목길을 더럽힌다는 이유로 고양이들에게도, 고양이밥을 주는 사람에게도 사람들은 쉽게 적대적이 된다. 소설을 읽으면 작가가 사람들의 적의에 매일 받았을 상처와 그럼에도 밥 주기를 멈추지 않는 사랑의 원동력을 헤아리게 된다.
황인숙은 “길고양이들과 인연을 맺은 이래 불행감을 맛보지 않는 날이 드물었다”며 “한 달에 30만원이면 동네에서 사람을 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런 형편이 될 때까지 어차피 주는 밥, 행복한 마음으로 줘야겠다”고 말했다.
정철훈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