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고르 고향마을서 보낸 540일의 향기… 곽재구 산문집 ‘우리가 사랑한 1초들’

입력 2011-07-29 17:54


2009년 7월, 시인 곽재구(57)는 안식년을 맞아 순천대 문예창작과에서 시 강의를 잠시 멈추고 인도의 시성(詩聖) 타고르의 고향인 산티니케탄으로 떠난다. 그리고 2010년 12월 말까지 540일 동안 산티니케탄에 체류하며 글을 쓰고 사진을 찍고 여행을 한다. 타고르의 마을에서 그는 처음으로 시를 쓰던 1970년대 시절의 오래 묵힌 자신의 마음과 마주한다.

“하루 24시간 8만6400초를 다 기억하고 싶었던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스무 살 때였지요. 1970년대 중반이었고 삶의 현실은 척박했습니다. 정치적 피폐함이 극에 이른 시간 속에서 내가 좋아하는 타고르의 시편들을 읽는 순간들은 작은 천국이었지요. 시가 있어서 행복했고 타고르가 있어서 지상 위의 어떤 길이건 끝없이 걸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책머리에’)

곽재구의 산문집 ‘우리가 사랑한 1초들’(임프린트 톨)은 그가 산티니케탄에서 만난 시간의 향기에 대한 이야기이다. 평화의 마을이라는 뜻을 지닌 산티니케탄은 타고르가 작가로 명성을 얻기 전까지는 평범한 농촌 마을이었다. 타고르는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당대 최고의 교육을 받은 엘리트였지만 계급과 빈부 격차를 타파하기 위한 혁명적 이상을 품고 가문의 본향인 산티니케탄에서 ‘아마르 꾸띠르’(나의 오두막집)라는 농촌 공동체를 세운다. 오늘날까지도 이 흔적은 남아 있지만 산티니케탄에서 타고르의 영향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내면적인 것, 사람들의 삶 속에 깊이 파고들어 전해지는 정신에 가깝다.

곽재구는 그곳 벼룩시장의 어린 소녀에게 10루피를 주고 종이배를 산다. 한화 250원 정도지만 인도에서는 한 끼 식사를 배불리 먹을 수 있는 돈이다. 시인은 종이배를 보며 타고르의 시 ‘종이배’를 떠올리고 소녀를 타고르가 보낸 선물이라고 믿는다. 종이배를 사 가지고 와서 동네사람들에게 자랑할 때 옆에서 이야기를 듣던 한 아가씨가 그에게 타고르의 시 ‘황금빛 배’를 읽어보라고 권한다.

“먹구름 울고 비가 쏟아집니다/ 슬프고 외롭게 나는 강둑에 앉아 있습니다/ 추수는 끝나고 볏단들은 비에 젓습니다/ 강물이 쿨럭쿨럭 흐릅니다/ 벼를 베며 나는 비에 젖습니다// (중략) // 배가 너무 작아 태울 곳이 없다고 당신은 말하는군요/ 내 모든 황금빛 영혼을 다 실은 탓입니다/ 먹구름 쿨럭이는 하늘/ 텅 빈 벼논 가에 나 혼자 서 있습니다/ 황금빛 배는 가고 빗속에서 나 혼자 서 있습니다”(타고르의 ‘황금빛 배’ 부분)

산티니케탄에는 시인의 일상과 늘 함께한 사람들이 있다. ‘릭샤’라는 자전거 택시를 모는 릭샤왈라들이다. 시인은 그곳의 모든 릭샤왈라들의 이름을 한 번씩 다 불러보겠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처음 보는 릭샤왈라에겐 꼭 이름을 묻는다. 그런 버릇은 금세 소문이 퍼졌고 어느 순간, 릭샤왈라들은 먼저 시인에게 다가와 자신의 이름을 말해준다. 다보스, 수보르, 란짓, 로또또르….

그 가운데 시인에게 꽃 이름을 가르쳐준 사람은 오십대의 수보르였다. 노래하는 집시인 다보스는 시인에게 반소리(피리)를 가르쳐 주었다. 어느 날 다보스는 시인을 태우고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좁은 골목길로 데려간다. 영문을 몰랐지만 시인은 그냥 몸을 맡긴다. 동네 안쪽엔 뜻밖에도 연꽃이 만발한 연못이 있었다. 그곳에서 연꽃 몇 송이를 실은 채 맨발로 자전거를 타는 여학생을 만나고 돌아오면서 시인은 혼자 중얼거린다. “인생에 좋은 일이 많이 있기를.”

아버지가 타고르 시인의 주방장이었다는 찻집 주인 깔루다, 타고르 문학을 영역하며 책으로 펴낸 브라만 계급의 처녀 투툴, 달빛 냄새가 난다는 조전건다 나무를 가르쳐준 처녀 임리타 등은 시인의 마음속으로 성큼 들어온 소중한 인연들이다.

이런 일도 있었다. 짜이 가게 앞을 지나는데 한 인도 아가씨가 그를 보고 미소를 지으며 안으로 들어오라 하더니 차를 대접한다. 영문도 모르고 차를 얻어 마신 날 밤, 옥상에 올라가 별을 보며 누워 있다가 시인은 벌떡 일어난다. 시인은 8년 전에도 산티니케탄에 머문 적이 있었다. 당시 그는 맨발의 어린 소녀에게 신발을 사 신으라며 돈을 주었던 것이다. 짜이 가게 처녀는 바로 8년 전의 맨발 아이였다. 시인은 잊었는데 론디니라는 이름의 소녀는 아직도 시인을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신분과 나이, 빈부와 국적을 초월한 어울림의 시간들을 시인은 ‘별과 별 사이의 여행’이라고 말한다. 별과 별 사이의 여행에서 시인은 인도의 가을과 겨울에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꽃인 ‘부겐빌레야’를 제목으로 한 편의 시를 쓴다.

“꽃이 필 때 아무 소리가 없었고/ 꽃이 질 때 아무 소리가 없었네// 맨발인 내가/ 수북이 쌓인 꽃잎 위를 걸어갈 때/ 꽃잎들 사이에서 아주 고요한 소리가 들렸네// 오래전/ 내가 아직/ 별과 별 사이를 여행할 때/ 그 소리를 들은 적 있네// 외로운 당신이/ 외로운 길을 만나 흐느낄 때/ 문득 고요한 그 소리 곁에 있음을”(‘부겐빌레야’ 전문)

정철훈 선임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