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을 연주하는, 열음… 피아니스트 손열음, 쿨하게 여름 나기
입력 2011-07-28 18:24
피아니스트 손열음(26)의 입에서 한국근대문학 대가들의 이름이 흘러나온 건 뜻밖이었다. 한국단편소설의 백미로 꼽히는 ‘메밀꽃필무렵’을 쓴 이효석과 ‘봄봄’을 지은 김유정을 좋아한다고 했다.
손열음과 두 작가 사이에는 고향이 강원도라는 공통점이 있다. 이효석은 평창, 김유정은 춘천, 손열음은 원주다. 머나먼 타향에서 음악을 공부하는 그녀에게 이효석과 김유정의 작품은 예술적 감성을 자극하는 동시에 향수를 달래는 그릇인 듯 싶었다.
지난달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14회 차이콥스키 국제콩쿠르에서 피아노 부문 2위를 차지한 뒤 귀국한 그를 지난 25일 서울 신문로 1가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 3층 문호 아트홀에서 만났다. 다음 달 16일까지 국내에 머무는 손열음은 30일 평창 알펜시아 리조트에서 열리는 제8회 대관령국제음악제(7월 24∼8월 13일)에 출연, 모차르트 피아노협주곡 23번 A장조를 연주한다.
그녀는 인터뷰 내내 웃음보를 터뜨렸다. 20대의 손열음은 어떤 질문에도 망설임이 없었다. 세계적인 연주자 반열에 올라섰지만 스타의식을 찾아볼 수 없었다. 당차면서도 유쾌한 그녀가 때로는 진지하게, 때로는 발랄하게 쏟아내는 즐거운 수다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열음이란 이름은 무슨 뜻을 담고 있나요?
“열음은 ‘열매를 맺다’라는 뜻이에요. 엄마가 성악을 하고 싶었는데 결국 포기하셨죠. 그래서 딸을 낳은 뒤 대신 열매를 맺으라는 의미로 열음이라는 한글이름을 지었나 봐요.”
-본인이 음악적 재능을 타고 났다는 사실은 언제 알았어요?
“어릴 적부터 알았죠, 하하. 다섯 살부터 피아노를 쳤는데 제가 남들보다 진도가 빨랐거든요. 가르치던 선생님이 1년 정도 지나니 더 이상 가르칠 게 없다며 다른 분을 소개해 주셨어요. 저는 음악을 정말 좋아했어요.”
손열음은 어려서부터 ‘영재’ 소리를 듣고 자랐다. 수상 경력도 화려하다. 1997년 차이콥스키 청소년 콩쿠르에서 1위 없는 최연소 2위를 차지했었고 2002년에는 이탈리아 비오티 국제 콩쿠르에서도 최연소 1위에 올랐다. 1998년부터 클래식 영재 프로그램을 운영하던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은 그를 첫 번째 후원할 영재로 선발했다.
일반계인 원주여중을 졸업한 손씨는 곧바로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에 입학했다. 한예종이 예술계 영재를 위해 주말에 개설한 프로그램에 다녔던 터라 크게 적응에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봤다. 여기서 피아니스트 김대진(49) 교수의 지도를 받았다. 이후 2006년부터 독일 하노버 국립음대에서 유학 중이다.
-음악을 하기 위해서는 돈이 많이 들어가지 않나요?
“아버지는 사업을 하셨지만 집안이 아주 부유한 편은 아니었어요. 어릴 적에 레슨비 때문에 부담이 됐었죠. 초등학교 때 산 피아노 한 대가 전부였어요. 그래도 현악기 배우는 친구들보다는 사정이 나아요. 현악기는 현과 활을 자주 교체해야 해서 정말 돈 많이 들거든요. 하지만 피아노는 안 그래요. 한예종에 들어간 뒤에는 학교에 있는 피아노를 이용하니 따로 돈 들 일이 없어요.”
그녀가 지금 소유하고 있는 피아노는 고 박성용 금호아시아나그룹 명예회장이 2006년 자신의 집무실에 있던 뵈젠도르퍼 피아노(180년 전통의 명품)를 독일로 공수해 준 것이다.
-피아노 외에 다른 악기에도 관심이 있다고 들었어요.
“현악기를 좋아해서 2∼3년 전에 바이올린을 하나 샀죠. 실내악에 관심이 많거든요. 바이올린의 음 위치는 대략 아는데 게을러서 아직 한번도 연주를 해보지 못했어요.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피아노보다 바이올린이 더 좋아요. 나중에 기회가 되면 실내악을 가르치고 싶어요.”
-클래식 말고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음악이 있나요?
“한 80% 정도는 클래식이구요. 나머지는 재즈와 록이죠. 미국의 70년대 록 그룹인 그레이트풀 데드(Grateful Dead·미국의 5인조 록그룹으로 1994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의 리더인 제리 가르시아를 좋아해요. 재즈에는 조예가 깊은 것은 아니지만 빌 에반스도 좋아하구요.”
-‘나는 가수다’를 본 적이 있나요?
“TV를 자주 보진 못해요. 그래도 무한도전은 가끔 봐요. ‘나가수’도 봤는데 가수 이소라씨가 떨어져서 너무 안타까웠어요. 그분 정말 예술성이 대단해요. 하하.”
-젊은 남자 연주자들과도 친분이 있을 텐데.
“영훈 오빠(첼리스트 송영훈) 잘 생겼죠? 제가 봐도 잘 생겼어요. 요즘 알려진 연주자로는 현악4중주단인 ‘노부스 콰르텟’의 리더 김재영(27), 피아니스트 김선욱(24) 하고 친해요. 이번에 같이 입상한 조성진(18)도 잘 알구요.”
-남자친구로 사귀는 사람은 있나요?
“흐흐. 없어요. 남자친구라…. 딴 거로 넘어가면 안돼요?”
-여름휴가 계획은?
“제 휴가보다 팬을 위한 연주가 우선입니다. 평소에 많이 쉬거든요. 제가 악기 앞에 오래 앉아 있질 않아요. 작년에는 부모님이랑 당일코스로 춘천, 주문진, 봉평, 평창 등을 다녀왔어요. 대관령 국제음악제도 한번 가본 적이 있는데 이번에는 연주자로 참여하게 됐어요. 평창에서 좋은 음악제가 열리니 많은 분들이 오셔서 편안하게 감상하시고 재충전하시길 바래요.”
-휴가지가 모두 강원도였군요. 강원도에 대한 자부심이 큰가 봐요.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 모두 강원도 출신입니다. 저는 원주시 홍보대사잖아요. 하하. 강원도 출신 문인들도 좋아합니다. 춘천에 가면 김유정이 생각나고, 봉평에 가면 이효석이 생각날 정도예요. 2007년 동계올림픽 개최지 발표 때는 잠도 안 자고 새벽 6시까지 중계 봤어요. 소치에 졌을 때 상심이 얼마나 컸는지 몰라요. (그녀는 평창의 동계올림픽 개최가 확정되던 날 자신의 트위터에 ‘강원도 만세’라고 글을 올렸다) 이번에 평창이 돼서 너무 기뻤어요. 제 생애에 고향에서 열리는 동계올림픽을 구경할 수 있잖아요. 혹시 올림픽 전야행사 때 불러주시면 한걸음에 달려와서 축하연주를 하겠습니다.”
-요즘 젊은 세대가 좋아할 것 같지 않은 김유정의 소설을 좋아하네요.
“김유정의 ‘봄봄’을 좋아해요. 제가 독일에서 교포 친구들에게 추천해주니 좋아했어요. 쓰인 언어가 정말 한국어의 정수인 것 같아요. 단편이라서 읽기에도 부담이 없어요. 이효석의 소설은 ‘메밀꽃 필 무렵’을 좋아해요. 이효석의 생가도 가봤어요. 이효석이 그 당시에 김치보다 토스트를 더 좋아했다고 해서 웃었어요.”
-요즘 읽고 있는 책은 무엇인가요?
“제프리 버튼 러셀이 지은 ‘데블’이라는 책이에요. 고대부터 최근까지 악에 대해 다룬 내용이죠. 역사에도 관심이 많아요. 한국, 일본, 중국 역사책도 많이 읽었죠. 아이패드에 넣어두고 틈틈이 읽어요. 악보를 아이패드에 넣어둬야 해서 아이패드로 책을 많이 봐요. 연주여행 다닐 때 부피가 줄어서 편하거든요.”
-피아노 말고 스트레스 해소는 어떻게 하나요?
“저희 집안이 농구광이에요. 저도 원주에 연고를 둔 프로농구 원주 동부를 좋아하죠. 03∼04시즌부터 시작해서 거의 매 시즌 경기장에서 살았어요. 김주성 선수는 만인의 연인이라 별로구요.(웃음) 양경민이나 황진원, 박지현 선수를 좋아해요. 양경민 선수 광팬이었는데 이제는 은퇴해서 아쉬워요. 황진원 선수는 KT 시절부터 제가 눈여겨봤구요. 박지현 선수는 팀 조정능력이 탁월해요.”
그녀는 동부 선수들이 자주 가는 원주 시내 식당이름을 꿰고 있을 정도로 열렬한 팬이었다.
-좋아하는 작곡가나 연주곡이 있나요?
“모차르트를 제일 좋아하죠. 특히 모차르트의 종교음악은 분위기가 있어요. 피아노곡 중에서는 슈만의 크라이슬레리아나를 좋아하구요. 쇼스타코비치의 현악 4중주도 좋죠. 이번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도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하는 게 있었어요.”
차이콥스키 콩쿠르는 참가자로부터 연주 DVD를 받으면서 시작된다. 이번의 경우 대략 150명이 참가했다. 이 중 30명이 모스크바에서 4단계 경연을 거쳤다. 1차에서 뽑힌 12명이 2차에 진출하면 여기서 8명이 선발됐다. 다시 3차를 통과한 5명이 4차에 진출했다. 4차는 5명이 두 차례 연주를 통해 최종 순위를 가렸다.
-연주는 어떻게 진행됐나요?
“1차는 50분간 연주하는데 차이콥스키의 소품이 반드시 하나 있어야 돼요. 2차는 60분짜리인데 러시아 작품이 포함되죠. 3차에서는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을 하고, 나머지는 자신이 원하는 곡을 연주하죠.”
-콩쿠르에서 러시아 연주자에 이어 2등을 했는데 참가할 때부터 입상할 거라고 생각했나요?
“욕심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죠. 자신감도 있었구요. 그렇지만 입상은 하늘이 내리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제가 연주한 걸 나중에 다시 봤는데 잘하던걸요. 하하.”
-10년 뒤 자신은 어떤 모습일까요?
“지금보다 더 잘해야죠. 잘할 자신도 있고요. 뭔가 도전해 보고 싶어서 올해부터 재즈를 배우고 있어요. 재능이 있어야만 재즈를 할 수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군요. 저는 클래식이랑 재즈가 섞이는 퓨전은 싫지만 나중에 ‘손열음의 재즈피아노’ 콘서트를 하고 싶어요. 기획자로 좋아하는 스타일의 음악가를 불러 연주회도 열고 재주 있는 어린 친구들도 발굴하면 좋겠어요.”
이제훈 기자 parti98@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