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직검사가 그린 대한민국 1세대 검사 ‘이준’

입력 2011-07-27 19:24


고종황제의 헤이그 특사였던 이준(1859∼1907) 열사는 한국 최초의 근대적 법학교육기관인 ‘법관양성소’를 1회로 수료한 법조인이었다. 그는 수료 다음 해인 1896년 한성재판소 검사시보로 임명돼 법조인의 길로 들어섰지만, 아관파천 이후 구한말의 어지러운 시국 속에서 검사시보직을 내던지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귀국 후 사회활동에 전념하던 그는 1906년 대한제국 최고 사법기관인 평리원 검사로 재임용된다.

서울고검 임무영 부장검사와 작가인 부인 한영희씨가 공동 집필한 소설 ‘황제의 특사 이준’(문이당)은 방대한 사료와 현지답사에 근거해 이준 열사를 검찰의 역할 모델로 구현했다는 데 의미가 있는 작품이다.

소설은 이준이 황태자 전하의 가례라는 경사를 맞아 전국 죄수들에게 사전(赦典:특사)을 베풀기 위한 명단 작성 임무를 맡은 데 주목한다. “죄수들에게는 생명이 걸린 일이라 경솔함을 피하기 위해 다시 한 번 임검을 나가 감옥서의 죄수들을 점검하고 돌아와 명경지수와 같은 마음으로 명단을 작성했다. 명단을 완성해 (평리원 재판장) 이윤용에게 건넨 것은 토요일인 2월 2일로, 설날인 2월 13일 전에 사전이 내려질 예정이었으니 상당한 시간 여유가 있었다.”(138쪽)

하지만 관보에는 이준이 작성한 명단 대신 이윤용과 법부 형사국장 김낙헌, 법부대신 이하영이 뇌물을 받고 서로 모의한 끝에 작성한 새로운 명단이 실려 있었다. 이준은 뇌물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 1904년 9월 경기도 시흥지역에서 경부선 철도 부설에 항의하며 일으킨 농민반란 주모자 성우경을 직접 신문해 자백을 받아낸다.

이준은 아직 걸음마 단계였던 개화기 검찰의 부패를 적발하는 검찰 내 포청천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상관을 능멸한 죄로 체포된 이준은 태형 100대에 처해진다. 고종황제의 감형 조치로 석방되지만 평리원 검사직에서 면관되기에 이른다. 이후 황제는 이준을 은밀히 중명전으로 부른다.

“너는 상설과 함께 피득보(彼得堡:상트 뻬쩨르부르크)에 가 공사 이범진을 만나라. 범진은 아라사 황제 니고랍(尼古拉:니꼴라이) 2세를 알현하도록 주선해줄 것이니 아라사 황제에게 짐의 친서를 전하고 만국평화회의에 너희들이 짐의 대표단으로 참석할 수 있도록 협조해 달라고 부탁하라. 이후 해아(헤이그)로 가되 범진의 둘째 아들 위종을 데려가도록 하라.”(261쪽)

하지만 만국평화회의가 열리고 있던 네덜란드 헤이그는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 해군의 위용에 세간의 관심이 쏠려 있었다. 일본의 최신식 군함 츠쿠바호와 치토세호가 로테르담항에 입항했고 일본 해군 장교들은 헤이그 시내를 활보하고 있었다. 이 광경을 지켜보며 초라한 호텔에 묵고 있던 이준은 좌절하고 만다. 마침내 1907년 7월 14일 이준은 최악의 경우에 대비해 준비해 온 독약을 삼키고 세상을 뜬다.

임 부장검사는 “가장 중요한 이준 열사의 사인과 관련한 부분은 전적으로 창작이다. 열사의 사인에 대해서는 정부의 공식조사로도 결론을 내릴 수 없어 결국은 분사(憤死)라는 모호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데, 소설은 그런 표현으로는 매우 부족했기 때문에 당시 열사의 처지였다면 어떻게 행동했을까를 깊이 고민한 끝에 이런 식의 마무리를 택했다”고 말했다.

정철훈 선임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