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김의구] 학살과 음악
입력 2011-07-27 18:05
프랜시스 코폴라 감독의 1979년 영화 ‘지옥의 묵시록’에는 리하르트 바그너의 음악이 나온다. 헬리콥터 부대가 베트콩 마을을 공습하면서 한껏 볼륨을 높인 헬기의 스피커를 통해 내보내는 곡으로, ‘발퀴레의 기행(騎行)’이다. 이 곡은 바그너의 대표 오페라인 ‘니벨룽겐의 반지’를 구성하는 4편의 작품 가운데 두 번째 작품에 들어 있다.
니벨룽겐의 반지는 지하세계에 사는 소인 부족 니벨룽겐이 라인강 밑에 있던 황금을 훔쳐 만든 반지가 거인에게 넘어갔다가, 지크프리트에 의해 되찾아진 뒤 그의 죽음과 함께 라인강으로 되돌아간다는 서사극이다. 발퀴레는 최고의 신 보탄이 여신 에르다와 사이에 낳은 9명의 딸이다. 영웅들이 죽으면 신들의 궁전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 발퀴레의 기행은 날개 달린 말을 탄 발퀴레가 하늘을 달리는 광경을 표현한 웅장한 곡이다.
아돌프 히틀러가 열렬한 바그너 숭배자였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어린 히틀러는 바그너를 들으며 정치를 꿈꿨고, 권력의 의지를 다졌다. 나치의 뉘른베르크 집회는 매번 바그너의 ‘마이스터징거’ 서곡 연주로 시작했다. 히틀러는 2차 세계대전 내내 바그너 원본 악보를 베를린 벙커에 보관하기도 했다. 코폴라 감독은 이런 점 때문에 미군이 베트콩을 살해하는 장면에 바그너의 음악을 넣었다.
노르웨이 테러범이 범행 당시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고 있었을 것이라는 외신 보도가 나왔다. ‘영원한 빛(Lux Aeterna)’이라는 곡으로 ‘반지의 제왕’ 2편 ‘두개의 탑’ 예고편에 쓰인 음악이다. 영국 음악가 클린트 만셀이 작곡한 것으로 당초 마약을 다룬 영화 ‘레퀴엠’의 주제곡으로 사용됐다. 피터 잭슨 감독이 이를 편곡해 반지의 제왕에 사용하면서 ‘탑의 레퀴엠’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더 인기를 모았다.
테러범이 실제 음악을 들었는지 확실치 않다. 사실이라 해도 그가 지옥의 묵시록 장면을 모방한 것인지, 코폴라 감독의 혜안이 32년 후 광기 어린 살인 현장을 미리 꿰뚫어 본 것인지 불분명하다. 다만 음악의 잠재력에 소름이 돋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또 하나 눈길을 끄는 것은 반지의 제왕도 니벨룽겐의 반지와 동일한 북유럽 신화에서 모티브를 따왔다는 점이다. 절대반지, 부러진 명검, 몸이 안 보이게 하는 신비의 힘…. 같은 스토리를 기반으로 하는 오페라곡이 유대인 학살에 동원됐고 영화 음악은 다중 살인에 사용됐다니 우연의 일치라고 일축하기에는 섬뜩한 뭔가가 있다.
김의구 논설위원 eg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