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멘토’ 이지성 작가 “진정한 인문학은 약자를 위한 실천”

입력 2011-07-27 20:14


2004년 12월 31일 밤 서른 살 무명작가 이지성은 전화를 받았다. 대학 동창이었다. 잔뜩 취해 있었다. “너 너무 비참하다. 난 너를 존경하지만 13년 글을 써도 안 됐으면 이제 그만해야 하지 않겠니.” 그는 울먹이며 “가슴 아프다. 정신 차려서 결혼도 하고 정상적으로 살면 좋겠다”고 했다. 이지성은 “알았다”며 끊었다.

이지성(37)은 2007년 가을 ‘여자라면 힐러리처럼’으로 떴다. 미 국무장관 힐러리 클린턴의 출세 요인을 분석한 자기계발서였다. 각 분야 1인자의 인생에서 성공 법칙을 뽑아낸 ‘꿈꾸는 다락방’은 100만부를 돌파했다. 2009년 출간한 ‘스물일곱 이건희처럼’은 최근 영어로 번역돼 미국 서점에 깔렸다.

여러 사람이 읽고 고무됐다. 인생이 바뀌었다는 독자도 있다. 대부분 권태에 젖고 삶의 바닥을 헤매다 이지성의 책을 만났다. 그들에게 울림이 컸다. 생존 욕구를 일깨웠다.

이지성은 지난해 11월 인문고전 독서법 ‘리딩으로 리드하라’를 내고 인문학 멘토(조언자)로 각인됐다. 정·재계 인사들의 독서교사로 회자돼 유명세를 치르기도 했다. 22일 서울 여의도에서 만난 이지성은 “나는 특정 인사의 가정교사가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비참하게 사는 사람이 내 독자”라고 말했다.

교대 입학

이지성은 1993년 3월 작가가 되기로 했다. 전주교대 2학년 때였다. 학교 도서관에서 운명처럼 받은 느낌이었다고 이지성은 말했다. 교대는 아버지 권유로 진학했다. 이지성은 재수해서 92년 입학했다.

그 전까지 이지성은 책과 거리가 멀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받은 독서상은 의외였다. 교실에 비치된 20여권을 읽은 대가였다. 몸이 아파서 책읽기 말곤 할 게 없었다고 이지성은 설명했다.

중학교 3학년 말에는 종말론 서적을 탐독했다. 호기심에서였다. 교회 창고에 100여권이 있었다. 연구 자료였을 것이다. 다미선교회의 시한부종말론을 접했다. 신도들이 곧 하늘로 들려 올라간다는 내용이었다. 세상이 망한다는 대목에 충격을 받았다. 친구들에게 ‘손잡고 천국 가자’는 편지를 3장씩 썼다.

교대 합격 후 아버지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과 장자의 ‘장자’를 권했다. 이지성은 장자에 빠져 명상 소설을 찾아다녔다. 순수이성비판은 어려웠다. 3분의 1쯤에서 포기했다. 아버지도 안 본 책이었다.

이지성에게 작가는 생애 첫 목표였다. 아버지에게 “중퇴해야겠다. 교사는 안 맞는 것 같다”고 했다. 아버지는 뭘 할 건지 물었다. “산에 들어가서 책 읽고 글 쓰려고요.” 아버지는 빗자루를 휘둘렀다.

손가락질

자주 결강했다. 도서관에서 책 읽고 글을 썼다. 주로 시를 지었다. 필명은 이지운(二志雲)이라고 붙였다. 학교 복사실에서 원고를 무더기로 복사했다. 출판사 20∼30곳에 보냈다. 모두 반송됐다. 집 우체통이 넘쳤다. 발신자 주소를 학교로 옮겼다. 원고는 학교 우체통에도 쌓였다. 친구들이 혀를 찼다.

글은 한 번도 채택되지 않았다. 임용고시 경쟁률은 높아졌다. 학생들은 입시공부 하듯 준비했다. 이씨는 시만 썼다. 평판은 나빠졌다. “병신 미친놈 사이코 또라이 등 별 얘기 다 들었어요. 그때 교대 분위기가 공부 안 하는 학생은 사람 취급을 안 했어요. 그렇게 멸시받은 건 난생 처음인 듯해요.” 후배들도 피했다. “(이지성과) 같이 있으면 인생 조지니까 옆에도 가지 말라”는 말이 돌고 있었다.

96년 졸업했다. 평점은 4.5 만점에 2.2였다. 임용고시 응시 자격이 안 됐다. 이지성은 전북대 법대 3학년에 편입했다. 입대를 미루고 글공부를 더 하겠다는 심산이었다. 부모는 임용 미달 사태를 노렸다. 전북대 도서관에는 낙방한 교대 동창이 몰려왔다. 이지성이 법대에 가서도 정신을 못 차렸다는 말이 퍼졌다. 97년 시집 ‘언제까지나 우리는 깊디깊은 강물로 흐르리라’ 등 2편을 냈다. 안 팔렸다.

군대

98년 전북대 졸업 후 육군에 입대했다. 이등병은 책을 보거나 글을 쓸 수 없었다. 독서를 허용해 달라고 대대장에게 간청했다. 그는 찌푸리며 말했다. “디스 이즈 아미(This is army).” ‘여긴 군대야’라는 의미로 한 말이었다. 대대장은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지성은 “허락 안하면 청와대에 터뜨리겠다”고 했다. 다음 날 내무반장이 “이등병은 매주 독후감을 써서 보고하라”고 하달했다.

자대 배치 직후 이지성은 교회에 갔다. 내무반에서 유일했다. 유령 취급을 받았다. 아무도 말을 안 걸었다. 이지성은 교회에서 초코파이 두 상자를 얻어다 내무반에 풀었다. 6개월간 반복했다. 사납던 내무반장이 점호 후 말을 걸었다. “막내가 큰일 했다.” 이지성은 제대 전 9개월간 군종병으로 일했다.

병장 때 임용고시를 봤다. 교원 명예퇴직으로 인력이 모자란 시기였다. 이지성도 응시 기회를 얻었다. 군복을 입고 경기도교육청 시험장에 갔다. 합격했다. 지원자 1100명 중 903등이었다. 이지성은 2000년 8월 전역하고 다음 달 분당의 서현초로 발령났다.

전향

첫 학기 교사 생활은 엉망이었다. 학생이 군대 졸병처럼 보였다. 월급날만 기다렸다. “그토록 싫다며 피했던 길인데 작가로 첫발도 못 떼고 원점으로 돌아간 기분이었죠. 애들이랑 학부모에게 상처를 많이 줬어요. 악덕 교사였죠.”

겨울방학이던 이듬해 1월 자취방에서 한마디가 들렸다. ‘Are you happy(행복하니)?’ 이지성은 거울을 보고 있었다. 절박함에 사로잡혔다. 텔레비전을 버렸다. 독서와 필사에 매달렸다. 하루 2, 3권씩 읽고 2, 3시간씩 베껴 썼다. 국내외 유명 작가의 자서전과 인터뷰를 수집했다. 너덜대도록 읽었다.

빈민의 삶이 눈에 들어왔다. 이지성은 달동네 옥탑방에 살고 있었다. 집들은 대부분 단칸방이었고 10가구 중 3∼4가구는 단전·단수 안내 공지가 붙은 동네였다. 노인들은 폐지 수집으로 버텼다. 종일 모아 2000∼3000원씩 벌었다. 자녀들은 정신질환과 알코올중독에 시달렸다. “그분들과 대화하면서 너무 안타까웠어요. 비참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죠. 가난이 질병 이상으로 무섭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때 이지성은 ‘처절하게 사는 사람을 위해 글을 쓰겠다’고 다짐했다. 허세를 버렸다. 자서전과 평전을 섭렵했다. 3년간 2000권을 읽고 150여권을 필사했다. 자기계발서 작가로 전향했다.

실천

독서를 강조한 이지성의 자기계발서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인문학을 실용학문으로 만들었다는 지적이다. “실용이 나쁜 건가요. 저는 인문학이 먹고사는 데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 분들에게 인문고전을 왜 읽어야 하는지 이야기하는 겁니다. 진정한 인문학은 약자를 위한 실천 아닐까요.”

이지성은 NGO인 기아대책과 함께 아프리카에 학교와 병원을 짓고 있다. 약 2년간 7000만원을 기부했다. 상반기 특강 수입 2400만원도 모두 쾌척했다. 이지성을 멘토로 삼은 독자도 동참하고 있다. 출판사를 상대로 기아대책 후원엽서를 책에 붙이는 운동도 시작했다. 그의 쪽방촌 독서교육은 활발하다.

“출판계가 나눔에 무감각했던 것 같아요. 연예인도 기부와 봉사에 열정적인데 어떻게 보면 작가가 더 열심을 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출판계에 기부 문화가 정착되면 좋겠어요.”

이지성은 덧붙였다. “거창한 말을 했는데, 옳은 일이니까 하는 거지 제가 인격적으로 바른 사람이어서는 아니에요.”

글 강창욱 기자·사진 김민회 기자 kcw@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