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기의 溫 시네마-고지전] 그들은 무엇 때문에 거기서 싸웠나
입력 2011-07-27 19:06
오랜만에 충무로 웰 메이드 대작이 나왔다. 장훈 감독의 신작 ‘고지전’은 한국전쟁 당시 가장 치열했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전장인 애록고지 전투를 다룬다. 장 감독은 ‘의형제’에서 남북 간 이념을 휴머니즘으로 풀어냈었다면 고지전에서는 전작의 휴머니즘과 더불어 ‘전쟁터’라는 상황과 장소에 더 무게를 둔다. 싸워야만 하는 이유는 애록고지 병사들이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 앞에서 더 이상 그들의 명분이 되지 않는다.
어두운 밤, 애록고지 산등성이에 악어중대원들이 납작 엎드려 숨을 고르고 있다. 산 넘어 적의 동태를 살피지만 반기는 건 기분 나쁜 전장의 음산하고 굵은 빗줄기뿐이다. 이때 갑자기 들리는 뿔피리 소리는 병사들을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몰고 간다. 멀리서 희끄무레하게 하나 둘 보이는 적들이 번개 빛에 반사되어 마치 흰개미 떼처럼 반대편 산등성이를 새하얗게 물들이며 순식간에 화면을 가득 채운다. 공포와 긴장감으로 일그러진 남한 병사는 살아남기 위해 발악하듯 M1 소총의 방아쇠를 마구 당기기 시작한다.
1950년 6월 27일 의정부전선에서 인민군 중대장 현정윤에게 생포된 소대장 강은표와 김수혁 일병은 서로 헤어진다. 2년 뒤 애록고지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리던 악어중대가 북한과 내통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한 국군 방첩대는 강은표 중위를 급파한다. 거기서 생사를 알 수 없었던 김수혁과 불과 2년 사이에 같은 계급인 중위로 재회하고 현정윤과 운명적인 적으로 다시 만난다. 석연치 않은 사건을 수사하는 미스터리 설정이나 저격수, 개성 강한 부대원 캐릭터 등으로 이야기하는 방식은 어딘지 낯이 익다. 고지전의 시나리오 작가가 공동경비구역 JSA의 원작자임을 감안하더라도 이러한 설정과 장면은 관객에게 익숙한 전쟁영화 형식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여기에 덧붙여 애록고지 그 자체와 ‘소품’에 캐릭터를 부여한 장치는 고지전의 스토리에 생기를 불어넣어 이 관습적인 익숙함을 오히려 장 감독의 오리지널로 승화시킨다. 애록고지를 뺏고 빼기는 치열한 전투를 벌이던 악어중대원들은 나중을 위해 자기들의 물건을 숨겨두고 후퇴한다. 그것들을 우연찮게 발견한 북한군은 서로의 물건을 교환하기 시작한다. 남한군의 화랑담배와 최신 유행가 전선야곡의 가사, 북한군의 정종은 죽음과 같이 사는 병사들에게 어느덧 즐거운 낙이 돼버린다. 생기 넘치는 고향의 예쁜 여동생을 담은 빛바랜 흑백 가족사진은 이들 모두가 어쩌면 한 동네 고향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향수를 불러일으키게 한다. 또한 영화적으로 이것은 이념을 넘어서 인간적인 교감을 불러일으키는 ‘소품 캐릭터’이기도 하다.
그러나 너무 많은 폭격으로 민둥산이 돼버려 수십만 남북한 병사의 시체로 이루어진 ‘애록고지 전쟁터’는 반드시 서로를 죽여야만 살아남는다고 말한다. 와이어에 매단 카메라는 병사들과 같은 속도와 앵글로 따라간다.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산을 오르는 병사들의 공포와 긴장감으로 뒤섞인 표정을 관객에게 그대로 전달한다. 안개가 자욱한 애록고지에서 최후의 일전을 앞두고 남북한 병사가 함께 부르는 전선야곡은 감정을 극대화시킨다. 액션 신에 방점을 찍기보다는 왜 싸우는지 이유를 알 수 없는 전장의 참혹함을 표현하기 위해 감독은 ‘감정선’을 마치 오케스트라의 마에스트로처럼 지휘한다. 사건을 풀어내고 화자처럼 스토리를 끝까지 주도하는 신하균과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서 파괴되어버린 인간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슬픈 눈의 고수, 거친 전장에서 인간성을 불러일으키는 캐릭터이지만 적으로서 반드시 죽여야만 하는 김옥빈, 승리의 확신에 차 있었지만 너무 많은 전투에 명분을 잃어버린 냉철한 북한군 지휘관 유승룡이 합주한다.
이렇듯 휴머니즘적인 설정과 사실적인 전장의 묘사는 역설적으로 반전의 메시지를 극대화한다. 살기 위해 기도했으나 이 지옥에서 벗어나기 위해 죽여 달라고 갈구하는 고수의 눈빛이 남는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제목에서 말해주듯 ‘전쟁터’ 그 자체이다.
(서울기독교영화제 수석 프로그래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