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원 사모의 땅끝 일기] 中2 서희가 우울했던 이유

입력 2011-07-27 19:05


정신없이 바쁜 보름을 보냈습니다.

기말고사를 치르는 아이들에게 예상문제를 뽑아 조금이라도 시험을 잘 보게 하려는 엄마의 맘으로 아이들을 달달 볶다시피 공부를 시키고 초등학교 1학년 아들 체험학습날에 김밥을 점심도시락으로 싸는데 문제는 나머지 녀석들 모두 다 김밥을 아침밥으로 먹고 학교에도 한두 줄 싸가지고 가고 싶다고 하길래 새벽부터 서둘러 묵은지김밥(묵은지 꼭 짜서 잘게 썰어 참기름과 깨에 조물조물 무치고 달걀지단 두툼하게 부치고 소금간한 밥을 참기름으로 살짝 볶아 냉동실에 꼭꼭 싸서 넣어둔 김에 따끈한 주먹밥으로 간단히 싼 김밥입니다)을 100줄 정도 쌌습니다.

자르기도 전에 손으로 김밥을 한 줄씩 들고 먹는 아이들을 보며 별다른 재료도 없이 묵은지로 싼 깁밥이 그렇게도 맛있는지 한 입 가득 베어 문 아이들의 입이 어찌나 귀여운지 아침부터 우리집은 추석명절처럼 아이들이 소란합니다.

그런데 가장 소란스러워야 할 서희가 보이질 않는 겁니다(서희는 가정폭력으로 저희 집에 온 지 한 달이 된 중학교 2학년 여학생인데 지금은 어찌나 밝게 생활하는지 우리 온 가족의 귀염둥이가 되었습니다).

어찌된 일인지 조심스럽게 눈짓으로 아이들에게 물어보니 서희가 어제 오후부터 말도 안 하고 침대에 누워 우울해한다는 이야기를 살짝 하는데 제가 느끼기에 웬만한 일이면 표시도 없을 아이가 어쩐 일인가 싶어 김밥 두어 줄을 들고 침실로 들어갔습니다.

이미 다른 아이들은 한 차로 태워 학교에 보내 놓고 서희 담임 선생님께 서희 등교가 조금 늦겠다고 전화를 드리고 서희에게도 편안한 마음으로 있으라며 김밥과 계란국을 쟁반에 담아 침대 머리맡에 두고 돌아서는데 머리까지 이불을 푹 덮어쓴 서희가 느닷없이 저에게 한마디 말을 던집니다.

“왜 나는 엄마 등본에 에스더처럼 올려주지 않는데…. 엉엉엉….”

“에스더가 배에스더가 된 것처럼 나도 이서희가 아니라 배서희로 하고 싶다고.”

갑작스런 서희의 울음 섞인 고함에 저와 문밖에서 서희가 염려돼 서있던 남편은 뭐라고 대답을 할 수 없어 서로 얼굴을 바라보았습니다.

에스더는 일주일 전에 저희 집에 하나님의 선물로 오게 된 생후 두 달 된 갓난아기입니다. 에스더를 저희의 호적에 올리고 감사기도를 드리며 아이들과 감사파티를 했는데 그러고 보니 그때 서희의 얼굴이 어두웠다는 것이 생각났습니다.

‘그랬구나. 그랬어. 그래서 네가 그렇게 맘이 아팠구나.’

저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사모님이라 부르지 않고 처음부터 저를 엄마라고 부르는 서희가 속으로는 자신이 겪은 불행한 가정환경을 모두 잊고 이서희가 아닌 배서희로 살고픈 마음이 간절했던 모양이었습니다.

서희를 끌어안고 “네가 이서희든 배서희든 내가 너를 낳았든 낳지 않았든 너는 언제나 내 딸이고 엄마는 서희가 주님서희로 커주길 간절히 바란단다. 그리고 우리 딸이 잘 커주어서 우리 딸 덕 보고 싶어. 사랑한다. 내 딸 서희야.” 서희의 귓가에 속삭여 주며 엉덩이를 두드려주고 남편과 함께 온 맘을 담아 서희에게 축복기도를 해 주었습니다.

상식적인 어떤 말도 서희를 위로할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정직한 제 맘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너무나 감사하게 주님께서 서희의 맘을 어루만지셔서 제가 서희 학교 가서 먹으라고 김밥을 포장하기도 전에 웃으면서 주방으로 들어와서는 제 등을 끌어안고는 학교 다녀오겠다고 인사하고 나갑니다.

너무도 바쁜 시간 속에 혹시라도 잊어버리고 산 건 없는지 오늘은 설거지를 미루고 잠시 생각해 봅니다. 하지만 제 머릿속은 그것도 잠시, 오늘 학교에서 방학식을 하고 일찍 하교해 돌아올 아이들에게 해줄 ‘방학시작 축하도넛 간식’을 만들 생각에 또다시 바쁘게 손이 움직입니다.

■ 김혜원 사모는

남편 배요섭 목사(전남 해남 땅끝마을 아름다운교회)만 보고 서울에서 땅끝마을 송호리로 시집왔다가 땅끝 아이들의 ‘대모’가 돼 버렸다. 교회가 운영하는 땅끝지역아동센터 아이들 50여명의 엄마로 오늘도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을 푼다.

김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