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오지랖이 넓은 ‘시스터 조’… 美 멤피스 거주 조월호씨의 ‘낯선땅에서 열정적으로 살기’

입력 2011-07-27 17:39


그녀는 무슨 분야든 저돌적으로 덤벼들어 배우고 익힌다. 사람을 사랑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사람 사랑’이 ‘하나님 사랑’이라고 믿는 그녀는 어디에서나 남 도와줄 일을 찾는다. 특히 영어 때문에 억울함을 당하는 한국인들을 위한 일이라면 가게 문을 닫거나 사람을 채용해 일당을 줘가면서까지 나선다. 교통사고와 이민 관련일은 물론 세금문제, 장례문제, 보험문제 등 교포들이 직면하는 거의 모든 문제에 관여해 처리를 도와준다. 이 때문에 ‘워킹 딕셔너리(walking dictionary)’란 별명도 얻었다.

미국 멤피스 저먼 타운에서 ‘퍼펙트 핏’(완벽한 맞춤)이란 바느질가게를 운영하는 조월호(60·미 멤피스교회)씨 이야기다. 그녀의 집은 늘 사람들로 북적댄다. 지역 어머니들과 소녀들이 모여 성경공부를 하고 요리와 뜨개질을 배운다. 함께 점심을 먹으며 사랑을 나누기도 한다.

꿀벌처럼 부지런하게

그녀는 꿀벌처럼 부지런히 움직여 낯선 이국땅에서 주인처럼 살고 있다. 그녀의 하루 일과는 새벽 3시 시작된다. 부엌으로 가면 86세의 어머니가 단아한 옷차림으로 식탁에 앉아 성경을 읽어주길 기다린다. “정정하시던 어머니가 이제 눈이 많이 어두워져 제가 매일 성경을 읽어드려요. 성경공부가 끝나면 어머니는 다시 잠옷으로 갈아입고 주무셔요. 하나님의 말씀이 곧 하나님인데 그 하나님을 잠옷 바람으로 대할 수 없다고 하셔요.”

출근하면 새벽 4시. 가게 문을 여는 오전 9시까지 바느질을 한다. 가게 문을 열면 손님들과 대화하느라 작업을 할 수 없어 새벽에 바느질하는 다섯 시간이 그녀의 가족을 먹여 살린다. 바느질가게에 오는 손님들도 그녀의 매력에 끌린다. 맡길 옷이 없어도 그냥 샌드위치 한 개 사들고 온다. 어떤 이는 우울한 일만 있으면 그녀를 찾아온다. 그녀의 활짝 웃는 모습을 보면 저절로 기운이 난단다.

바늘 하나로 낯선 땅에서 살아남기

그녀가 바느질을 시작한 것은 하나님의 섭리였다. 처음에는 바느질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미국에 도착해 교회에 입고 갈 하얀 블라우스가 필요해 만들어 입은 것이 전부였다.

“교회에 입고 가자 사람들이 ‘너무 이쁘다’고 했어요. 미국인들의 일반적인 인사치레였는데 그 말을 그대로 믿고 ‘나도 옷을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지요. 그때의 경험이 나중에 바느질 가게 운영으로 이어질 줄은 몰랐어요.”

1989년 멤피스로 이사 왔을 때 막막했다. 그때 ‘아 내가 하얀 블라우스를 잘 만들었지’란 생각이 떠올랐다. 처음엔 세탁소에서 수선 감을 가져다 집에서 일했다. 가끔 헌옷 파는 가게에 가서 옷을 몇 점씩 사다가 뜯어 어떻게 만들었는지 살피기도 했다. 조금씩 솜씨가 늘었다. 헌옷 가게에서 웨딩드레스를 사와 모두 뜯고 다시 붙이는 작업을 되풀이했다. 웨딩드레스, 들러리 드레스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매상이 오르기 시작했다.

2002년 드디어 가게를 오픈하고 직원들을 채용했다. 그녀의 바느질 솜씨는 입소문을 타고 퍼져 백화점 일도 맡았다. 백화점 매니저는 가격도 솜씨도 만점이라고 전 매장에 소개해주었다. 2008년 저먼 타운에 조그만 빌딩을 구입해 바느질가게를 확장 오픈했다.

윌리엄 홀덴을 닮은 그 남자

그녀는 어린시절부터 ‘콧구멍 빼고 안 아픈 데가 없는 아이’로 통했다. 20대 때는 폐결핵과 결핵성 늑막염을 앓았다. 친구의 부탁으로 한 미 공군 중사의 통역을 해주었다. 미 영화배우 윌리엄 홀덴을 닮은 그는 “미국에는 의술이 발달해 얼마든지 그녀가 치료받고 건강해질 수 있다”며 결혼해 미국으로 가자고 했다. 인정이 많은 그 사람이 좋아졌다.

1977년 7월 1일 태어나 처음으로 비행기를 탔다. 남편과 입양한 18개월 된 딸 진주와 함께였다. 남편의 고향 아칸소주 워렌에 정착했다. 낮에는 은행에서 일하고 밤에는 아칸소주립대에서 은행경영학을 공부했다. 주말이면 양로원에서 가서 노인들에게 성경을 읽어주고 찬양을 들려주었다. “그곳에 계신 분들이 찬송가 ‘저 높은 곳을 향하여’를 한국어로 불러주는 것을 너무 좋아하셨어요. 제가 가면 그 찬송을 꼭 불러 달라고 하셨어요.”

야간대학을 다니며 양로원에서 봉사하고, 은행·학교·법정 등에서 통역 자원봉사를 하는 그녀의 이야기가 지역사회에 알려졌다. 학교와 교회, 여성단체 등에서 한국 이야기를 해 달라는 요청이 줄을 이었다. 그때마다 그녀는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한국 문화와 역사를 알렸다. 85년 빌 클린턴 아칸소주지사로부터 ‘올해의 여성상’을 받았다. 매년 지역사회에 봉사를 많이 하고 자기계발에 힘쓴 직장여성 한 명을 선정해 주는 상이었다.

빌 클린턴이 주는 상을 받고

“시상식 후 클린턴 주지사가 ‘그 당당한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거냐’고 묻더군요. 저는 ‘제가 당당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당당한 것이지요. 나의 주인은 하나님이니까요’라고 말했어요.”

그 무렵 남편의 행동이 점점 이상해졌다. 남편은 술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는 사람이었다. 의처증도 앓고 있었다. 결혼 당시에는 전혀 몰랐던 사실이었다. 그녀 몸에 모기에 물린 상처라도 있으면 마약을 했다고 의심하며 때리고 방에 가두었다. 밤마다 딸 진주와 함께 공포에 떨어야 했다.

결국 13년의 결혼생활을 끝내기로 결심했다. 법원에 가서 모든 재산을 남편에게 넘기겠다는 각서를 제출하고 이혼 재판을 하지 않았다. 그녀가 가진 것은 주머니에 있는 27달러가 전부였다. 그때가 서른일곱 살이었다. “89년 10월, 진주를 데리고 이삿짐 트럭에 오르는데 한없이 눈물이 흐르더군요. 내가 좋아하는 꽃 화분과 진주가 치던 피아노만 싣고 멤피스로 떠났습니다.”

홀로 아이를 키우며 미국생활을 새롭게 시작했다. 처음엔 자동차에 기름 넣을 줄도 몰랐다. 울기도 많이 울었고 그러면서 강해졌다. 지금은 엔진 소리만 들어도 자동차 어느 부분에 문제가 있는지 정비사 앞에서 아는 척할 수 있을 정도가 됐다. 그리고 이젠 자신의 일뿐 아니라 영어 때문에 억울한 일을 당하는 한국교민들을 보면 적극 돕는다. 아예 “내가 해줄게”란 말을 입에 달고 산다. “교통사고나 법적으로 어려운 일을 당하면 사람들이 저한테 먼저 전화해요. 그러면 가게 문을 닫고라도 달려가지요.”

생애 최고의 선물, 진주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말은 ‘진주 엄마’다. 진주 엄마란 말만 들어도 미소가 절로 지어진다. 진주를 입양한 것은 75년 결혼 직후였다. 진주는 임신 6개월 만에 출생한 조산아였다. 체중이 2㎏도 안됐다. 산모는 병원비를 낼 수도 아이를 키울 수도 없는 처지였다. “입양하려는 사람이 없다”는 얘기를 전해들은 그녀는 생후 3일 된 아기를 만나러 갔다. 미동도 하지 않고 숨만 쉬던 아이가 그녀를 보자 작은 눈을 뜨고 새끼손가락을 움직였다. ‘아 하나님이 내게 주신 딸이다.’ 남편은 반대했지만 그녀의 마음은 확고했다. 아이 없이는 미국에 가지 않겠다고 버텨 결국 입양했다.

“진주는 눈송이처럼 내 인생에 내려앉아 내 기쁨이 되고 내 목숨이 되었어요. 진주가 다섯 살이 되면서 유치원에 가게 되었을 때 처음 입양 사실을 말해주며 언제든 낳아주신 부모를 만나고 싶으면 만나라고 했어요.”

진주는 보스턴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후 현재 시카고 BCG금융회사에서 일하고 있다. 진주는 최근 엄마가 회갑을 기념해 펴낸 에세이집 ‘낮선 땅에서 홀로서기’(매직하우스) 출판기념회에서 사람들에게 엄마를 이렇게 소개했다.

“왜 사람들이 우리 엄마만 만나면 사랑에 빠지는 걸까요? 그건 아마도 우리 엄마가 가는 곳마다 그리스도를 표현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엄마가 표현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고 사랑에 빠집니다.”

그녀의 통장엔 잔액이 없다. 자신이 버는 것을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지 않고 버는 대로 어떻게든 쓸 궁리를 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요즘 아이들이 부모와의 대화가 단절된 채 인터넷 게임에만 빠져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소녀들의 날’을 만들었다. “사실 전도하기 위해 시작한 모임이에요. 아이들이 이웃집 친구, 학교 친구들도 데리고 와요. 어머니와 딸들이 함께 성경공부하고 요리와 뜨개질을 배우며 즐겁게 대화합니다.”

그녀는 은퇴 후엔 24시간 이웃을 섬기고 사는 것이 소망이라고 했다. “내가 하는 것이 없어져야 합니다. 내 것이 아니고, 내가 하는 것이 아닌 것이 될 때 100% 행복해집니다.” 낯선 땅에서 홀로서기에 성공한 그녀의 인생 성공비결이다.

글 이지현 기자·사진 이병주 기자 jeeh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