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술 회고록] 충남 예산군 신례원리 박우석 할머니

입력 2011-07-27 19:02


“목사 외손자, 좋은 교회서 목회하는 모습 보는 게 소원”

충남 예산군 예산읍 신례원리 대로변. 대문을 활짝 열어놓은 빨간 기와지붕 집에서 곱게 수놓은 삼베저고리로 한껏 멋을 낸 박우석(91·신례원성결교회 권사) 할머니를 만났다. 왜 이렇게 대문을 활짝 열어놓고 계시냐고 놀라는 기자에게 “뭐 가져갈 게 있간디”라며 빙그레 웃는 박 할머니. 기독교인은 베풀고 살아야 한다며 마당에서 키우는 호박, 옥수수, 토마토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그냥 싸준다고 한다.

사는 동안 남에게 베풀기 위해 박 할머니는 과수원, 바느질품을 팔며 열심히 살았다. 일평생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무릎 꿇고 기도하는 생활을 해왔다. 박 할머니는 지금도 “난 예수님이 제일 좋다”고 말씀하신다. 그는 이제 외손자가 좋은 교회에 청빙받아 목회하는 모습을 보는 게 소원이다.

어머니의 기도

충남 아산시 신창면에서 태어났어요. 우리가 5남매인데 딸 셋, 아들 둘 중 둘째예요. 일정<일제 강점기> 땐데 아버지가 약국을 했어요. 그런데도 어머니가 금정꾼<금 캐는 사람>들 빨래하고 바느질품을 팔고 살았어요. 어머니 덕에 굶지 않았지요. 아버지가 노상 술만 먹고 다니고 생활비도 안 줬거든. 남의 집 사는데 세를 안 내서 쫓겨나고 그랬어요. 언니랑 나는 학교 못 댕겼어요<다녔어요>. 할아버지가 여자애들은 학교 못 댕기게 했어요. 낫 놓고 기역자도 몰랐어요. 근데 막내는 대학까지 보내서 선생 했어요. 한글은 교회 다니면서 배웠어요.

여덟 살 때쯤 예산군 신례원리로 온 거 같어. 열두 살 때 친구들이 교회 가자고 해서 처음 나갔어요. 동생 하나 업고 하나 손잡고. 감리교회를 댕겼거든. 그때는 하나님이 있나 없나 믿지 못했어요. 서른 넘어 하늘나라 보고 그때부터 믿기 시작했어요. 2년 댕기니께 우리 아버지가 성결교회 다니면서 예수를 믿고 술 담배를 딱 끊으시네. 아버지가 술 끊는다고 댕기신께 나도 아버지 댕기는 교회로 올 수밖에. 어머니도 아버지가 새사람 된께 더 잘 믿었어요. 밥을 풀 때도 꼭 십자가를 긋고 밥을 푸더라고요. 아버지는 예수 믿고 축복받아 땅 많이 샀어요. 일본놈한테 다 뺏겼지만. 그러더니 역시 내가 땅을 많이 사는겨.

어머니가 기도를 정성껏 하시더라고. 어머니가 교회 개척을 여러 군데 하셨어요. 신례원성결교회도 부모님이 개척했어요. 우리집 옆에다가 교회를 지었는데 일본놈들이 학교 한다고 교회를 못 오게 했어요. 해방되고 다시 교회를 지었어요. 그걸 팔고 현재 위치로 옮겨 지었어요.

어머니는 인공<6·25전쟁> 때도 인민군에게 전도하셨어요. 어머니가 “인민군이 잔뜩 있는데서 예수 믿으라고 하니까 지들끼리 ‘쏘까 쏘까’ 해서 밀려서 니네 집으로 들어왔다”고 했어요. 어머니는 전도를 많이 하며 아흔이 넘도록 사셨어요. 어머니의 철저한 신앙생활을 보며 자라서 나도 아이들을 그렇게 가르쳤어요.

바느질 품팔다

열여덟에 예산군 광시면 노전리 장로님 집으로 시집갔어요. 두 살 많은 최기원씬데 아들 일곱에 딸 하나인 집에 장남이에요. 교회에서 결혼했어요. 우리 시아버지가 옛날에 미친병 들었을 때 예수 잘 믿어 나았다고 예수 잘 믿는 집하고 결혼시켰어요. 식구가 열다섯인데 시아버지가 게으르셨어요. 시어머니는 생활력이 강하셨어요. 여기서 살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남편한테 자식도 가르쳐야 하니까 일본에 가라고 했어요. 스물둘에 갔다가 스물일곱에 돌아왔어요. 일본에서 드럼통 만드는 일을 했어요.

시집 가서는 먹고 살 수가 없어 품을 팔았어요. 뜨개질하고 바느질품을 팔았어요. 자봉틀<재봉틀>을 하나 사주면 먹고 살겠는데. 우리 아버지가 안 사줘. 나중에 사줬어요. 근데 우리 시집이 촌이라 바느질 하나 안 하는겨. 그래서 여기서는 못 하겠구나 싶어서 아들만 데리고 예산으로 왔어요. 바느질하는데 혼자 있으니께 자꾸 남자가 오는 거야. 그래서 신례원으로 왔어. 우리 아들이 네 살 정도 됐나봐. 그때는 친정아버지가 근처에서 이층집에 살았는데 보건소 하더니 의사 하대.

내가 바느질하는 건 도사야. 양복이니 두루마기니. 이불을 하나 누볐다면 쌀 두 말. 두루마기도 쌀 두 말. 돈도 있고 웬간히 살았어요. 근데 나는 워떡허든지<어떡하든지> 주는 사람이야. 그때 내가 스물다섯밖에 안 됐는데.

해방되니께 우리 아저씨가 일본서 나왔어. 일본집을 하나 얻었지. 딸 하나 낳고. 해방되니께 워치케<어찌나> 바느질이 많은지 사람 두고 했어. 딸 둘 아들 하난디 우리 영감이 애들 봐주고.

아버지는 6·25 나던 해 돌아가셨어요. 우리 형제들은 죽을 고비 많이 넘겼어요. 나는 은혜받기 전이었는데 용케 하나님이 피하게 해주셨어요. 청양에서 순사하던 시동생이 여기 와서 살았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근데 거기 있다가 대전에 끌려가서 구덩이에서 수백명이 죽었어요.

하나님을 만나다

해방직 후 인공 때 은혜 받았어요. 서른한살 땐데 이북에서 이강산 감리사라고 나왔어요. 그때는 내가 병이 들어서 죽게 생겼어요. 신경쇠약에다 기침에다 심장병에다 다 죽는다고 했어요. 우리 어머니는 기도를 많이 하니께 “니가 기도해야 한다 기도해야 한다” 하셨어요. 밤낮 없이 옷을 만들어 돈을 잘 버는데 기도할 새가 없었어요. 그런데 하도 앓으니께 목사님을 모시고 와서 기도를 하는데 “아이고 엄마, 약을 먹어도 안 낫는데 무슨 손을 얹어서 낫느냐”며 안 했어요. 이제 바느질도 못 하게 되고 돈도 다 없애고 죽을 판이야. 그러니께 어머니가 “기도원 가라, 기도원 가라” 하셨어요. 기도원도 돈 있어야 가지. 지금 돈으로 만원이나 줬는지. 내가 우선 먹을 것이 없으니께 쌀을 서 말 얻어다 놓고 기도원에 갔어요.

대천 성주산 기도원으로 갔어요. 그때는 건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전부 잔디밭에 앉았지요. 목사 있는 데만 홑이불을 치고 상 하나 놓고 이 감리사가 설교를 하는데 내가 이 감리사를 쳐다보니 입에서 불이 나와요. 다리가 벌벌 떨리는데 거기서부터 뛰었어요. 아침부터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사방으로 뛰다가 자빠지니 세상이 훤한 거여. “여기가 어딘지 아니” 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여기가 천당이다. 천당.” 거기 우리 아버지가 떡 앉아있어요. 6·25 나던 해 돌아가셨는데. 의자 하나에 사람 하나씩 앉아 있어요. 거기 앉아 있는 사람들은 남자고 여자고 하얗게 입었어요. 강대상에 세 사람이 앉아있는데 그 중 예수님이 가슴을 젖히니 십자가가 들었어요. 근데 내가 쓰러지니까 사람들이 목사님을 모셔왔어요. 목사님이 기도하니까 끊어졌어요.

그 시간부터 병이 깨끗이 나은 거예요. 너희 어머니가 기도를 해서 너에게 은혜를 준다는 소리가 들려요. 우리 어머니는 저녁 10시부터 새벽까지 무릎 꿇고 기도를 하더라고. 우리 아버지도 무릎 꿇고 기도를 많이 했어요. 우리 아버지가 의사를 하는데도 먹을 것이 없어 쫓겨나고 했는데 그때부터 집도 사고 땅도 사고 하는겨. 은혜 받고부터는 주위에 아픈 사람 없나 기도해주러 찾아다녀요. 저도 은혜 받고 기도하러 많이 다녔어요. 기도원에 기도하러 가면 100일 기도해요. 시어머님도 하나님이 잘 모시라고 해서 작은아들집에 잠시 계시다가 우리집에서 모셨어요.

대소변을 못 가렸는데 청양 사는 큰딸이 놀러 와서 같이 예배를 드리는데 우리 시어머니가 “아이고 이렇게 좋을 수가 없다” 하시더니 그때부터 대소변을 가리는 거야. 그러다 4개월 지나서 돌아가셨어요.

양복과 강대상

은혜 받고 하나님 말씀대로 과수원도 사고 땅도 샀어요. 살림해가며 기도원 댕겨가며 농사도 짓고 바느질 해가며 살았어요. 바느질을 환갑 지날 때까지 했나봐요.

하나님이 목사님한테 양복을 해주라네. 하나님은 먹는 분, 입는 분이 아니니께 목사님들한테 하라는 거예요. 환갑 지나기 두 해 전부터 양복을 해주기 시작했어요. 지금은 옷이 흔해서 양복 안 해줘요.

어떤 목사님은 양복을 한 번에 세 벌, 네 벌 맞추네. 양복쟁이가 통장에 돈 얼마 있냐고 물어요. 통장에 돈이 있깐. “바느질도 하고 농사도 짓고 하니께 여하튼 생겨. 걱정하지 말라”고 했어요. 제일 비싼 거 70만원짜리까지 해줬어요.

그때는 목사님들 양복이 무릎팍 나오고 팔꿈치 나온 게 많아요. 그러면 “목사님 어디 살아요? 며칠까지 어느 양복점으로 오세요. 양복 한 벌 해드릴게”하면 안 오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다 와요. 어떤 사람이 저더러 제정신이 아니라고 그래요. 아무리 바느질을 하고 돈을 벌고 은혜를 받았어도 어떻게 세 벌 네 벌 맞춰주냐고. 근데 얼마 전에 그 사람을 만났어요. “나 여태 살았어. 아흔한 살인디.”

강대상도 다섯 군데 해줬어요. 우리 신도가 이사 간 아파트에 가보니 궤짝을 엎어놓고 예배를 드리길래 강대상을 해줬어요.

기도의 축복받은 가정

큰아들은 한양공대 갔어요. 장학금으로 2000만원도 받고 공부 잘했어요. 회사를 다니다 그만두고선 학교 수학선생 한다고. 수학 잘했거든. 고등학교 수학선생으로 갔어. 거창고에서 선생하다 서울로 가서 교장까지 했어요. 신앙이 어릴 때부터 좋고 십일조도 잘하고 고향에 교회도 지었어요.

막내사위는 하나님이 연분이라고 해서 결혼시켰어요. 약사예요. 하나님이 사람 많은 곳에 약국을 하라고 하셨어요. 서울에 약국을 열어주니 손님이 나래비서는<줄을 서다>거요. 분당으로 옮겨서 사람 두고 약국 했어요.

우리 애들은 기도를 많이 해서 클 때 아픈 데 하나도 없었어요. 동네 사람들은 아프면 와서 기도해 달라고 해요. 하나님은 할 수만 있으면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함이 없다고 하셨거든.

바느질 하고 과수원 하면서 지<계>를 했어요. 푼돈 갖고 목외돈 만들었어요. 과수원 팔아서 큰아들 큰딸 줬어요. 막내딸은 약국 해줬응께 안 주고. 큰딸 아들은 목사고 딸은 원자력 박사예요. 하나님은 너 쓸 것 미리 아세요.

영감은 여든에 돌아갔어요. 전 해에 교통사고 나서 잘 못 걸었어요. 그때 이상하게 내가 구역예배하고 와서 “여보 당신이 먼저 죽어야겠네” 하니께 “내가 왜 먼저 죽어. 당신 안 죽고.” “아니 난 아직 아이들 장가 시집 보내고 죽을게”하니 아무 소리도 안 해요. 그러더니 누가 떡을 많이 줘서 줬더니 맛있네 맛있네 하면서 먹어요. 아침에 일어나서 밥을 한 그릇 먹은 다음 난 교회 갔다 점심 차려주려고 왔더니 아침 먹은 게 소화가 안 된대요. 그래서 “소화제 사 갖고 올게”하고 나가려다 갑자기 내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와요. “여보 당신 천당 갈 수 있어?” “그럼 내가 천당 못 가?” “참말로 갈 수 있어?” “그럼 못 가?” 그러고선 소화제 사와서 흔드니까 안 일어나. 뒷집 집사를 데려와서 “저 양반 죽었어 살았어?” 하니 불러도 안 일어나요. 목사님 오시라고 했더니 “벌써 돌아갔어”하는데 얼굴이 웃는 거 같었어.

기도로 점철된 삶

옛날에는 저 산꼭대기에 가서 천막을 짓고 매일 기도했어요. 대한민국 사람 기도를 다 하는겨. “예수 안 믿는 우리 사촌이 죽었다고 해도 걱정이 없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이 잘못 되면 내 책임이다”하고 다 기도하는 거야.

우리 영감은 신앙은 있는데 뜨겁지 않았어요. 새벽기도도 함께 다녔는데…. 목사님이 “최 권사님은 은혜는 없는데 교통사고 났을 때 죽었으면 지옥 갈 건디 박 권사님이 기도를 많이 해서 다치기만 했다”고 말했어요. 영감이 나중에는 성경을 많이 봤어요. 한 3년. 특별히 잘해주는 건 없었는디 신앙생활 잘하고 새벽기도도 잘 댕겼어요.

나는 평소에 우리 아이들이나 성도들한테 ‘기도라는 것이 살고 죽는 것’이라고 말해요. 우리 큰아들이 기도를 많이 하고 착실해도 항상 기도 많이 하라고 말해요. 하나님더러 우리 아들 기도 오래 하게 해달라고 기도도 하고요.

평소에 나라를 위한 기도도 많이 하는데 박정희 대통령 죽고 육영수 여사 죽었을 때도 나라를 위해 몇 시간 울어가며 기도했어요. 남북이 통일되면 북한 사람들한테 여긴 마음껏 찬송하고 기도할 수 있다고 말해 줄 거예요.

성경말씀 중에는 특별히 하나님이 널 택했다는 말씀을 자주 묵상해요.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 43:1)

“우리 하나님은 자도 지켜준다”고 믿어요. 찬송 중에서는 ‘복의 근원’을 잘 해요. 아침부터 저녁까지 해요. 언제든지 새벽기도를 드리고 매일 밤에는 저녁 8시에 집에서 예배를 드려요. 성경 말씀 읽고 찬송하고. TV 설교도 많이 봐요. 외손자가 목사인데 영성이 훌륭한 목사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해요. 기도 제목이 생기면 지금도 버스 타고 기차 타고 오산리 최자실기도원에 가서 100일 기도해요.

본이 되는 삶

하나님이 농사짓고 살림하고 잘 살라고 말씀하세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니까 못 살 턱이 없어요. 진실하게 살고 베풀며 살아야 해요.

하나님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마음이 아니므로 예배하는 자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해야 해요. 성경에서도 말씀하셨잖아요.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 4:2∼24)

나는 신조가 믿는 사람은 잘 먹고 잘 살고 잘 지내야 한다예요. 믿지 않는 사람 본이 돼 예수 믿게. 절대로 남의 돈 떼먹고 외상값 안 주는 이는 잘 안되는겨. 다른 사람이 나 보고 예수 믿겠다고 그래요.

연보

1920년 충남 아산시 신창면에서 2남3녀의 둘째로 태어남

1928년 충남 예산군 예산읍으로 이사

1932년 감리교회 출석

1934년 성결교회 출석

1938년 충남 예산군 광시면 노전리 7남1녀의 장남 최기원(당시 20세)씨와 결혼

1940년 큰아들 출생

1944년 신례원리로 이사

1946년 큰딸 출생

1947년 둘째딸 출생

1998년 남편 사망

신례원성결교회

1938년 박우석 권사 부모인 박완종·허정 집사가 개척했다. 41년 5월 신례원리 약 120㎡(40평)에 초가 예배당을 건축했다. 43년 11월 일제 강점기로 신사참배를 거부해 전국의 성결교회가 폐쇄될 때 신례원성결교회도 강제로 폐쇄됐다. 이때 일본의 눈을 피해 초등학교에 숨어 예배를 드렸다. 광복되면서 45년 10월 교회를 재건했다. 48년 1대 목회자로 한상교 전도사가 부임했다. 86년 지금의 위치에 지하 1층, 지상 3층으로 새 성전을 준공했다. 94년 10대 이병용 목사가 부임해 현재까지 시무하고 있다.

교회는 헝가리 네팔 카메론에 선교사를 파송하고 태국 싱가포르 멕시코 호주 선교사를 후원하는 등 해외 선교에 힘쓰고 있다. 국내에선 지방회와 미자립교회 15곳을 돕는 교회선교, 신례초교 성락원 신학생선교단체(KISA)를 돕는 기관선교, 신례원 지역 10가정을 돕는 이웃선교 사역을 하고 있다. 300여명 출석. 충남 예산군 예산읍 신례원리 302-1(041-334-2793).

예산=정리 최영경 기자·사진 강민석 선임기자 ykchoi@kmib.co.kr